도서실

무수한
갈피마다
풍기는
생생한 통나무 내음.
         나는 푸근히
         마셔 버리고 푸다.
         아니
         가슴속에 소롯이 피는 들꽃으로나,
         가슴 속에 뭉게지는 뭇꿈으로
         하고 푸다.

눈을 따라
주줄이
일었다 슬어지는
이슬의 알 알.
         나는 알뜰이 주워모아
         마음 속에 뚜렷한
         또 하나의 눈알을
         이루련다.

가을이 저물 녘에
나는 푸섶 사이로 나부끼는
커단 덩굴잎을 하나 주워서
맥맥이 흐르는
깊은 뜻을
캐려 애쓴다.

<문총 주최, 제4회 전국중고교생 한글시 백일장, 4292.10.9, 1석 입상, 공보처장상>
중고등학생 문예지 ‘학원’ 1959년 12월호 (통권 82호) 38면의 김경린 시평: 일석으로 입선된 이상억군(경기중 3년)의 시는 처음으로부터 끝까지 <메타포어>로서 이루어진 작품으로서 중학생으로서는 지나치게 재치있게 가꾸어 놓은 작품입니다. <무수한 갈피마다 풍기는 생생한 통나무 내음>이라든지 <눈을 따라 주줄이 일었다 슬어지는 이슬의 알 알> 등은 얼마나 멋이 있는 구절들입니까? 그러나 너무나 지나치게 <메타포어>의 세계로 파고 들어 갔기 때문에 얼핏 보기에는 <도서실>이라는 감이 나지 않는 것이 이 작품의 결점입니다.

거리의 神秘와 憂愁 [마을안 이야기, 두째]

李 相 億

또 感堵安 의때 릴뻐해말 고라'秘神'
'憂愁'라고 말해 둘 때의 隱密한 즐거움과 스며오기 始作하는 기쁨.
.終至初自 은먹러글 ,른투서 한 는되下拂 에字活 P9 ,소로비 ,서래이

I.

諸神이 退却한 이 거리로 나는 角笛 하나만을 꼲고 ㄴ아간다. 黃昏에 비낀 古風한 列柱의
거리를 돌고 마침내 돌아, 色音도 狼藉한 破片, 破片과 차마 향그러운 砲煙의, 그 莊嚴한 廣場 어구에 이르르면,

나는 삐에로의 입같은 웃음을 웃으며 華奢했던 饗宴의 날을 反芻한다. 헌데 난 暫時,

어디에 있을가??.........................................................아주 幽幽怪怪한, 出入口 잊은 洞穴을 안다네.
거기, 거기서 '裏'라는 즘생이 제법 難處하게 '恩寵'을 熱誠으로 默禱하고 있네만,
嘲笑와 詛呪와 抗辯으로 아리 새혀진 저 壁畵가 壁으로(하여금) 存在ㅎ게 한다는
것을 느껴 보게나.

눈총마다 街燈으로 狙擊해 가며, 廣圓의 아우ㅌ사이드를 돌아 드디어 나, 祭壇앞에로 闖 入하는 同時, 正門만을 貫通하며 神殿의 嚴灰白色을 犯해 들어오는 光芒이 있다.
저 廣場복판 鐵物巨像의 九十九 眼光은 狂暴한 惱痛을 내위에 입혀줘 왔네.

이미 나는 어중간한 方位에서 畏怖하고만 '있는 나'의 配役을 首肯하기 어렵다. 이윽고 나 는 마지막 道理로 뿔피리를 불어 神酒단지를 머리인 한 侍女를 待坐시킨다.
그네는 나의 마리아, C-girl이었네.

II.

挫折되었는 知性은 한 모금 神酒로 泥醉한다. 發熱한다. 放射한다.
及其也 主人없는 神殿을 밀쳐 나온다.

- 무얼 할건가?

그는 市井 복판 交叉된 거리에 선다. 그리고 뉘의 復位를 烈烈히 외친다.
그는 性急히 코스모스를 가꾸려는 나머지, '생각는 사나이'의 포우즈를 石桀殺ㅎ자 고 한다네. 또 끼리꼬와 달리를 물러 앉히고 루오로 하여, 地平面의 裝飾을 맡도록 말하데. 또 缺勤없는 現地測量技師가 必要ㅎ다고도 한다네.

그는 곳곳에서 憂鬱한 王子를 맞는다. 그리고 謙遜한 受諾만이 橫行되리라 한다.
그는 뉘로부터의 메시지가 外信部에서 接受되어 질 것은 아니라고 믿네. 마치 通話
改革을 땅땅 뚜들기면 빨락빨락 펴져 오는 새 紙錢소리 같이 그렇게 오리라 하며,
여기 啓示가 提示되지는 않은 채로 거리는 淨化된다네.

III.

迷路에서 橫死ㅎ지 않도록 約束받아지는 어디까지나 '나'뿐인 우리들 '미들부로우'.

IV. 別章

實物大의 自動마리오네뜨에 肩章을 한 雙씩 붙여주는 禍音書의 使徒들, 그들은 다시금 音響 管制 地區에서의 假面舞蹈會를 開催한다. 그러나 하많은 人間들은 安樂椅子를 剝奪 當했을 뿐, 뛰넘기 어려운 腦谷 아래로 丁寧 猛烈한 速度로 갈앉아만 간다. 皮膚의 傷處에 메숲지는 羊齒植物을 闇閉하여, 아? 人間들은 그 區區한 알리바이로의 口吻에 拷問 當하고 마는가?

여기 또, 우리의 記憶만을 澎湃시켜준 高層建物들의 事緣없는 密告가 오가는 午後, 限死코 氣絶한 瞬間들의 聖殿같은 停止는 太陽에 가위눌린 墓碑에 가위눌린 우리의 亡者들이 未來의 追憶을 借入해다가 過去를 企劃하는 새로운 臨終과 殉葬을 漏落시키고 만다.

標準時가 없는 거리의 鋪石들도 이젠 꼭 寸蟲을 닮아서 제따로 吉牌를 쥐고 賭博을 常食한다. 사이렌과 크락숀의 吹口가 鋪石위로 鳥瞰되는 都市, 不良아스팔트와 코발트 빛 하늘은 함께 罵倒 當하는 時刻을 記譜한다.

우리가 寢臺로 들면, 다름아닌 木槍과 防牌와 銀貨들이 가슴마다 하나 둘 斥和碑를 꽂우며, 革命을 劃策하는 마지막 날의 鐘樂을 繃帶로 감차 둔다. 아? 이젠 스윗치를 내리고 스크린을 하이얗게 還元시키라. 우리 겨우 겨우 睡眠을 얻으면 季節처럼, 季節처럼 끼쳐 오는 느낌이 있다.

우리는 왜 꿈을 꾸는가?

한알의 사과를 七等分하는 不公平같은 憂愁를 招致하며, ??한 湖畔의 果樹밭 벤치에서 茶香과 木管樂을 즐기려 할 때, 바야흐로 나의 船長은 出帆의 고동을 틀리어 준다. 祝砲의 불꽃을 매어단 窓을 끼고 도는 回廊을 올라, 나는 金가루의 和音을 뒤집어 쓴다. 어느덧, 피터팬 피터팬, 달뜬 하늘이 우리 밑으로 매끈히 흐른다.

V.

或 神이 存在하고 있다면, 모든 것이 그 神意에 따른다.
그리고 나는 神의 뜻 밖에서는 아무 것 하나도 하지 못한다.
或 神이 存在치 않는다면, 모든 것이 내게서 비롯된다.
그리고 나는 自身의 외로운 獨立을 肯定해야만 한다.
-K(afka)의 '城'에서-

[경기중고등학교 교지 '경기' 제 3호, 1962. 124-127면] *이름 밑의 도입부 석 줄은 S자 모양으로 읽어나가도록 의도된 것인데, 원래 시에서는 50년대 식자조판 시대의 특성을 살려 활자의 방향을 90도, 180도로 돌려 보는 시험을 한 것이었다. II 앞 부분의 石桀은, ?이란 글자 모양처럼 한 글자로 써야 하지만 컴퓨터에 없어 두 글자로 찍어 놓았다. 그 밑의 ‘通話改革’은 오자가 아닌데 이 시를 타자해 준 조교가 ‘通貨改革’으로 고쳤기에 다시 바로 잡았다.

뛰느냐, 안 뛰느냐, 그것이 문제다.
막느냐, 못 막느냐, 그것이 문제다.
나의 아버님은 경찰관이시다. 그것도 쫄짜가 아니라 금테가 챙위에 서린 연륜 있는 고참자(古參者)시다. 관할 서안의 쫄개들에게 한마디 쩡하면 전기 통한 듯 얼려붙일 수도 있고 화들짝 뛰돌아다니게도 할 수 있는 실권을 쥔 서장 각하이시다.

그런 걸 난 요즘 매일 아버님 각하 코 밑에서〈데모〉를 하고 쏘다니니 말씀이 안되기 세상 짝도 없는 것이다. 그것도 울 아버님께서 불행히도 내 머리 위 그러니까 G대학이 관할구역에 든 Q서(署)로 부임해 오시자, 이내 몇 차례씩 그 대견스런 관록에 짓적게 똥칠을 해 드렸으니 참으로 죄송스러워 마땅하다. 쫌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인륜(人倫)과 정의(正義) 아니면 불효(不孝)와 부정(不正) 또는 정의와 불효이거나 효도와 부정- 보다 쉽게 풀어서 얘기하자면, -아버님과 내가 문제를 푼 결과 아버님 ○, 나 ×, 또는 아버님 ×, 나 ○의 경우와 아버님 ○, 나 ○, 아니면 모두 ×를 받는 경우- 나는 바야흐로 이러한 상극하는 요소 사이에서 가장〈콤비네이션〉이 잘되는 조합(組合)을 골라잡아야 할 계제에 섰다.

허지만 나는 내가 생각해도 참 웬만큼은 영리해서, 이런〈시튜에이션〉속에서도 용케 생활을 엮어낼 줄 익히 알고 있다고 보아 무방하다. 하루 가운데 낮 동안은 내 용무에 분주히 돌아가다가도 저녁께부터는 가사(家事)에만 충실하며 적절하고도 충분한 효도를 진상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지(周知)하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내가 하룻밤 또는 그 이상 얼마라도 귀가를 할 수 없게 되는 날엔 이 효도를 이행할 길이 없이 천생 불효자가 되는 괴로움을 겪어야만 했다.

자꾸 자가발전(自家發電)식으로 내 난 곳만 잰 채 해서 안됐지만 실로 나는 다행히 공(公)과 사(私)를 가리는〈센스〉가 극히 잘 훈련되어 있는 듯싶다. 결코 이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버님께서도 이의 없이 인정해 오신 사실이다. 더구나 아버님네 서훈(署訓)이「至公至正」이어서 이 점에 있어서 우리 부자(父子)는 완전히 공통의 지상목표를 추구하는 것으로 양해가 되어 온 바이다. 그만큼 아버님과 나는 은근한 미쁨과 깎듯한 예의로 맺어진 사이였다.

좌우간 이런 족보로 나를 굴레지운 운명의 여신은 무척 익살을 즐기는 엽기적(獵奇的) 취미의 향유자임에 틀림없다.
알롱 장팡 드 라 빠트리
르 주우르 드 글르와아 레 따리베
저녁내 욱신거린 신경의 가닥들을 위안이나마 해주려고, 나는 마악 요즘 늘 흥얼대던〈라·마르세에즈〉의 가락을 생각해 냈다.『나서라, 조국의 건아들아, 영광의 날은 왔다!』라고 시작하여 끔찍한 말을 정말 끔찍금찍하게 나열하는〈프랑스〉국가(國歌)다. 원래 군가로 작곡된 것이라선지 언제나 참 씩씩해서, 좋다고 생각했다. 이때 내 방문이 벌컥 열리며 느닷없이 다구쳐 오는 음성,
『임마, 오늘두 대모했냐?』
〈데모〉를 대모라고 발음하면 아번님에 영락없다. 근본적 인식의 착오 현상이다.
『어서 들어 옵쇼. 그런데 공쩍으로 심문하시는 겁니까, 그냥 사쩍으로 물으시는 겁니까?』바야흐로 어리광이라도 부려 보는 거다.
『수사관으로서냐, 애비로서냐? 이 말이지.』반응도 눈치있게 유치한 게, 참 제격으로 맞는다.
『…….』나는 말없이 쿡쿡 웃었다.
『여기는 우리의〈스윗또 호무〉야.』그러면 그렇지 어련하실라구.
『오늘은 못 뛰었읍죠. 어제 그 쫄개 곤봉에 하두 시컨 멍이 잡혀서 왼쪽 다리를 아주 몬 쓰게 된 파잉걸요.』
『어 거 한결 잘 된 일이야. 이젠 박경위두 더 못 봐주겠다더라. 그놈의 대몬 참…』입맛을 쩍 다시며 풍채있게 거동해 나가셨다.

박경위(朴警衛)라면 그 작달막한 키에 까무잡잡한 얼굴, 캥캥한 몸매와 깐깐한 성격, 무슨무슨 쩍(的)이란 말을 버릇처럼 입에 붙이고 다니는 알진 경찰 중에서도 구렝이가 다 된 인물로 나와는 여간한 구면이 아니다. 우리는 근래 서로의 행사때마다 꼭 참석하여 교환(交驩)을 터 온 사이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노상 노상(路上)에서 대접했지만, 그는 내가 미쳐 공식 초청장을 못 띄워도, 번번이 참 많은 손님을 동반하고 또 많은 선물을 들려와서는, 우리의 행사를 더욱 성대하게 이끌어주고 왕창 흥을 돋우는 데 짜장 눈물겹도록 온정을 베푼 인사(人士)였다. 그래서 나와 우리 주최측의 인사들도 마지막에는 감격에, 감격에 겨웁고 북받쳐 마구 챙피를 무릅쓰고〈센치〉한 소녀처럼 펑펑 눈물을 쏟다못해, 혼자 실컷 감격을 소화시킬 장소를 찾아 골목길로 뛰어들어간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친절하고 자상스럽게도, 우리와 감격을 달래러 허겁지겁 열심히 쫓아온 손님들과 손을 잡고 좀 더 떳떳이 이 감격을 배설할 장소로 안내를 받아 갈 때는, 정말로 우리가 흘린 눈물과 뒤쫓다 흘린 손님의 땀을 합치면 수재(水災)도 잘 내는 한강의 홍수가 무색할 만한 지경을 당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특히 박경위는 이런 행사때면 틀림없이 어느 손님보다도 열성적으로 자청해서 다채로운「프로」진행을 계획 실천해 주는 비상한 재간이 있었다. 이런 때 손님측에서 가장 잘 하는 연기는 탈을 쓰고 북채를 휘둘러가며 추는 가면군무(假面群舞)였다. 그 진행 지휘 및 연습은 물론 박경위가 책임을 졌고 기실 그가 꼭 그런 자리를 맡어야할 적임자였다. 사실로 우리 주최측의 총의에 의하면 만일 그가 보다 적합한 천직을 찾아서 보다 안락한 생활을 누리게 된다면 십중팔구「사까쓰」의 감독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중론이었다. 알록달록한 큰 물방울 무늬옷을 입고 노 웃는 낯을 그린 숱한「삐에로」들을 오색풍선이 터지는 속에 이리뛰랴 저리뛰랴 시켜서 즐거운「코메디」를 연출함으로써 환시(環視)하는 관객들에게 많은 웃음거리를 선사하는 행복한 역할을 능히 해낼 만하다는 뒷공론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코메디」가 재미있어서 표값을 제대로 해내면 관객들은 그런대로 만족한 기분에서 실소(失笑)를 풍겨놓고 갈 터이지만 만약 그 연출이 졸렬해서 불만을 산다면 분노한 관객들은 족히 벽돌장은 아니라도 방석머리를 엥길 것이라는 회의론도 있기는 했다.

하여튼 나와, 뿐만 아니라 우리 주최측의 몇몇도 이 박경위님의 후덕(厚德)을 믿고 줄창 철면피한 폐를 끼쳐 오면서도 뭐 별로 송구스런 생각을 갖지 않거니와, 그 구실은 우리측에서도 그쪽의 행사에 빠질 수 없는 VIP로서의 역할을 해 온 소이(所以)에서다.

우리는 보통 우리의 행사가 아주 절정에 달했을 때, 손님의 성의를 받아들여〈이렇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많이 왕림해주신 데 대한 감사와 답례〉쪼로 상대방의 향응(饗應)-그러니까 반대로 우리가 손님이 되는 잔치에 참석케 되는 것이 일쑤다. 물론 이 경우 우리쪽도 염치없이 다 몰려갈 수도 없고 해서 주로 나와 같은 쟁쟁한 인사들만 대표격으로 뽑혀가게 되면 뒤에 쳐진 동료들은 이런 잔치에 못 끼게 됨을 섭섭히 여겨 안타깝게 발만 동동 구르는 것이다. 그러나 마련 많은 대연회가 열리는 날은 우리측을 깡그리 전세차편으로 모셔가기도 했다. 또 때에 따라서는 개별적으로 정중한 초청장이 와서 우리를 모셔가는 일도 있었는데 그것마저 굳이 사양하는 겸손한 친구들도 없지는 않았다.
물론 잔치는 성대하고 대접은 융숭한 게 보통이다. 어떤 날은 우리가 행사를 채 개최하기도 전에 성의껏 초청을 하길레 호의를 쾌히 받아들여 제만백사(除萬百事)하고 급습해 갔더니, 미쳐 잔치 차비가 다 안되어서 그냥 밖에서 서리만 맞은 일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어느 날엔 대개 차근차근 맞아들여서 화목하게 둘러 앉히고서 잔치를 벌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곳의 주효(酒肴)는 아주 별미여서 고 세련된 감칠맛이 요리조리 돌다가 혀끝에만 닿으면 오금부터 쩨릿쩨릿해 오는가 하자 이어 가슴 속에서 확 일렁이는 불꽃이 피어오르고 눈언저리로 피가 몰리며 몸을 다짝 솟구치게 하고 마는 흥겨움이 있다. 그러면 마침내 흥에 겨웁고 겨웁다 못해 그만 술병을 동그랑치는 친구도 생기고, 술잔을 깨던지는 취객도 나오고, 잔치상을 들러엎는 폭한도 나타나고 만다. 이때는 내가 손님을 대표해서 간절히 사과를 드리고, 손해배상을 해드린다고 간청을 해도 이런 일은 주인 측에서 이미 예상하고 각오한 바이니 다른 분은 염려 말고 즐거이 노시라고 하며, 그 취객과 폭한은 따로이 잘 모셔다가 정성껏 간호해 드리겠다고 다른 방으로 데려가고 마는 것이었다.

이밖에도 특별난 경우엔 VIP만을 위한〈얼·나이트·파아티〉도 개최했다. 저번에 그쪽에서 보낸 자가용차에 주빈격으로 초청받아 갔던 한 친구가 술회하는 바에 의하면, 어찌나 잘 차려 놓고 마구 술을 권해 오던지 아주 이취(泥醉)가 되어서 돌아오다가 자꾸 돌부리에 채이고 넘어져 이곳저곳에 멍이 들어, 결국 여러 날 병원 신세를 지고 말았다고 했다.

그리고 이 술자리의 화제는 매우 다채로와서 그 사연을 다 늘어 놓자면 한량없는 장광설(長廣舌)을 드러내야만 할 터인즉, 부디 그 요점만 꼬눠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한다.

자고로 금수강산이라 일컫던 한 고요한 나라에 악역(惡疫)이 들이쳐 날로 황무지가 되어갔다. 특히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인지라 몹쓸 계절병이 고개를 쳐들고 여름의 마루턱까지 치받치는 출발점이 됐다. 이 유행병의 특색은, 풍토병이어서 아예 그 병원(病源)의 뿌리 뽑기 위해서는 전염지구를 폐쇄하고 일체 출입을 차단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예방 및 검역과 예후(豫後) 조처를 위해 유능한 의사들을 책임량 할당제로 조직하여 생명까지 걸고 봉사하도록 해야만 된다고 했다.

좌우간 박경위와 나는 서로 행사와 용무를 위해 동고동락해온 구면이었던 데다가, 저번에 두 번째 Q서 유치장 신세를 지고 있을 때 우리 어머니, 그러니까 박경위에의 「사모님」께서 큰「보스톤·백」에 여러 가지 차입물을 들고 오신 길에 진짜「백」을 등에 업고 비공식적이나마 좀 간곡하게 을러대주신 덕분에 나만은 전과일범(前科一犯)으로만「리스트」에 오른 채 며칠 뒤 풀려나왔었다. 나는 곧 어머니의 처사를 나무랐지만, 그후에도 눈총받는 G대학 행사의 선봉을 맡았고, 그완 더욱 자주 대면하여 정의(情誼)를 두텁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경위는 자꾸 나만을 개밥에 도토리처럼 집어내어서 돌봐주겠노라 하며 성을 가셨다. 나는 이 점이 괘씸했다. 결국 적당히 헤어질 때의 인사는 둘이 꼭같이 당기고 미는 넌즛한 말투였다.

『이번 한번만 더 봐주는 것이야. 아버님 낯을 뵈서 … 제발좀 자중해서 행동을 삼가요 제발.』
『저두 이번엔 봐드리겠지만, 담에 또 옭아넣으시면, 어제까지 상관 아들만 빼돌려 낸 엄연한 비위 사실을 다 불어 버리겠어요. 저두 이만하면 당당히 봐드리는 셈인줄 아는데…』
이러구려 나는 절차상 번번이 콩밥을 먹고 나와도 서류상으로 상습범으로 낙인찍히지 않는 독보적 존재로서의 기록을 보유하게쯤 되었다.

나는 경찰서에서 보호를 받을 때면 노상 부모님께 대한 효도와 그 보은(報恩)을 어떻게 할까 하는 문제를 연구한다. 그래서 나는 허구헌 무료한 시간을 내가 처해 있는 요〈시츄에이션〉에 대한 체계적 고찰과 그 초지종의 분석비판으로 메꾸려는 것이다.

본시 나의 존경할 만한 외조부 한동학(韓東鶴)씨께서 외동딸의 데릴사위로 사람 좋은 울아버님을 물색해 놓으시고 그 직업까지 주선해 주실 때 바로 순사, 즉 경찰관을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어린 나이로 조실부모하여 외롭게 구박만 받으며 예제서 얹혀살던 아버님은 한 마을 안 가문 있는 집안의 체통을 이어받고 일자리까지 얻는 기회를 마다하셨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아버님께선 본래 경찰일에 맞는 위인도 아니고 처음부터 탐탁해서 발을 들여 놓은 노릇이 아닌지라 별로 요령이나 수완도 피우지 못하시고 만년경사(萬年警査) 만년경위를 꼬박 십여년간 더듬어서야 오늘의 감투를 쓰신 것이다. 그동안 일경(日警)에서 별로 저지른 일도 없고 하여 선임자(先任者) 격으로 머물러서 초창기의 온갖 애로와 6?25동란의 모진 고초를 한껏 다 겪어 차츰차츰 골동품적 인물로 자리잡으신 것이다.

할아버지께서 사위에게 이 일을 알선해 주신 것도 알고 보면 하도 일제의 순사놈들한테 시달리시다가 이독제독(以毒除毒)의 역리(逆理)로서 아예 문중에다 순사보조원이라도 두면 집안도 덜 부대끼고 남들도 도와줄 길이 있으리란 막연한 기대에서였다. 여기에 구실 삼아 덧붙이는 변명의 또하나는 이것도 역시 관(?)은 관인지라 옛적엔 등과(登科)하던 가풍을 아쉰대로 이렇게라도 계승시키겠다는 배려(配慮)에서라 했다. 사실 한학(漢學)에 조예가 깊으신 할아버님께선 과거를 볼래야 볼 수도 없는 몹쓸 세월을 타고 났다고 늘 한탄을 하셨던 터라 신학문도 못하고 썩 빼어난 재주도 없이 그냥 무던하기만한 사위를 관록(官祿)부치로 만들어 주시려고 무진 애를 쓰셨다 한다. 마침 이를 성취시켜주었던 사람이 당시 친일파로 제법 세도를 피웠고 우리 본가와 외가를 두루 잘 아는 구자판(具滋判)이었다. 그 무렵 구자판의 아래에는 팔굉일우(八紘一宇)와 대동아공영권건설을 뇌까리는 무리들이 모여 전쟁 초기의 대수롭잖은 승세에 득의양양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도 이 등등한 기세에 눌려서 꽉 입을 봉하거나 같이 들떠서 야단을 할 때도 눈에 가시처럼 한(韓) 노인은 이빠른 말만 했다. 그러시던 우리 외조부가 별안간 찾아보고 모처럼 청하신 일이라 적이 놀란 기색을 띠고 잠시 거드름을 피우다가 내심 반가와서 신원보증을 서주고 경찰부장 앞으로 소개장도 써줬던 것이다.

사실 그 판국에 끝까지 창씨개명을 않고 뻗대었던 한노인이 무슨 계기에 그처럼 타협적 방향으로 돌아섰는지 확실히 알려진 바 없지만 아마 외동딸을 앙궈 주려고 지체있는 집안에 혼사를 청해도 그 마을안 사람들은 한씨 집안이 지나치게 뻗대가 후환을 입을까 두려워하여 슬며시 발뺌들을 한 때문이란다.
그래서 재산없고 단출한 울 아버님이 그만 한자리를 차지할 몫이 난 것이다.

하여튼 이 일을 계기로 구자판은 우리집에 대해 큰 은혜나 베푼 듯이 두고두고 공치사를 하거니와 일제시(日帝時) 순사생활에도〈매우 유익한 점이 없지 않았을 것〉이라고 공언도 하며 억척을 부렸다.

좌우간 지금 내 생각엔, 외주부께서 모종(某種)의 역설적 효과와 의미깊은 배려에서 머리를 숙여 직접 찾아가셨을지 대충 납득은 가지만 역시 피치못할 환경의 압력에 굴복해 버린 그 취약성(脆弱性)에는 석연치 못한 이해와 측은한 동정마저 품게 된다. 더구나 어머님께선 입버릇처럼 내 성미가 외조부를 닮아서 정의감과 의협심이 강하고 혈기가 넘친다고 하시지만 내 언행이 그런 식의 결정론(決定論)으로만 설명되기 어려운 바가 많다고 스스로 느껴온다.

사실 구가(具家) 집안과 우리 집안은 옛 선조 적부터 묘한 관계가 얽혀 왔는데, 오대조(五代祖) 적만 하더라도 구가네는 우리 일가권속이 자리잡은 마을 변두리 동쪽 산간에 흩어져 사는 보잘 바 없는 화전민들이었다. 가전문서(家傳文書)를 보더라도, 그들은 우리 종가(宗家)로 정초마다 세사미(歲賜米)를 받으러 들이닥치곤 하는 통에 무척 골치를 썩힌 일이 빈번했다. 그리고 잠잠히 배부를 때도, 고작 대나무로 얼바구니를 엮어가지고 와서는 자기(瓷器)그릇과 바꿔줍시사고 조르며 귀찮게 굴어, 아예 그릇굽는 법을 가르쳐서 돌려보낸 일도 있고, 천자문을 비롯한 지필묵(紙筆墨)과 옷감, 약재는 노상 대 주다시피했다는 것이다.

그러던 것이 증조(曾祖)대 쯤해서 재빨리 시류(時流)에 눈을 떠서 장인(匠人)으로 나서거나, 장사를 시작한 것이 일약 성공한 셈이었다. 그런 판국에도 사농공상(士農工商)만 금과옥조로 알던 우리 할아버님은 그런 장삿속을 경멸하며 글이나 읊었다. 더욱이 씨족부락의 대가족제도 안에는 내홍(內訌)이 잦아 차츰 가문이 사양(斜陽)을 받고 기울다가, 내 조부대에 와서는 재산도 자손도 다 말라붙어 쓸쓸하기 짝이 없는 집안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아버님은 천생 고아처럼 서른 넘는 나이를 남의 집 눈칫밥에 옥죄어 지내야 했다.

구자판도 해방후 사오년간은 스스로의 모멸과 사회의 냉대 속에서 실의에 빠져 있다가 6·25가 터지는 바람에 처음판엔 두부로부터 시작하여 이젠 각종 군수일용품을 다 다루는 군납상(軍納商)으로 대성하였던 것이다. 세파의 기복을 용케 집어타고 닥치는대로 치부(致富)를 하는, 속물근성(俗物根性)이 철저한 기회주의자다. 그 성격도 아주 간교하고 파렴치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어서 금전상으로 이득이 생길 상대방을 보면 온갖 교사(巧詐)를 떨지만 별로 지체나 말발이 세지 못한 어수룩 이들에겐 당연히 갚아야 할 빚도 오만한 자세로 교활하게 회피하다가, 겨우겨우 공돈 내주듯 변리나 조금 치러주고 당찮은 생각만 내기가 일쑤였다.

그런데 내가 몸소 구자판의 집에 가서 또 한가지 놀라운 일을 체험했다. 두어달 전에 겪은 일이다. 해방 전에 구자판이 우리집 전답의 토지문서를 정리해 준다고 맡아가서 그 동안 토지개혁 통에 그냥 날려 보냈는지, 모두 제멋대로 처분해서 써버렸는지 도무지 소식이 없었다. 요즘 군납상을 해서 상당히 셈이 피인 것을 보고 꼭 보상을 하도록 신칙을 몇 번 해 두고, 마침 내가 그 회답을 들으러 갔던 차에 어른은 없다고 열댓살난 까까머리 아들놈이 거들먹거리며 나를 대했다.
『아버님께서 뭐 일러놓구 나가시지 않던?』
한참 뚫어지게 훑어본다.
『응 아까「메모」를 하나 써줬는데〈캐비넷〉속에서 꺼내줄 게 있다구 기다리게 하랬어.』
『누구를?』
나를 가리키는 줄 알면서 짐짓 물어봤다.
『뭐? 당신이지 누구야. 우리 아버지가 옛날에 당신 아버지에게 유익한 일자리를 얻어줬구, 그래서 당신은〈친아들같은 사람〉이라구랬어. 당신이 그 사람이냐? 그렇지, 다 알아.』
나는 물론 제 애비도 우습게 얘기하는 녀석을 놓고 나는 말문이 막혔다. 한참만에 굼뜨게 집어다 준〈메모〉를 펴보니 보상쪼로 지불하겠다는 금액의 계산서였다. 그 금싸라기같은 전답을 다 들어판 합계가 고작 용돈푼 떼어쓰기나 좋을 만했다. 그렇게 채견을 하고 얼마만에야 받는 결과가 기껏 요건가 싶다.

좌우간 돈을 내줄 양인가 보다 하며 기다리고 있으려니까, 그 집에 오래 살았고 우리집안 내력도 잘 안다는 늙수레한 행랑할멈이 닥아와 아는 체를 한다. 아까 그 아이가 동란통에 구자판의 셋째첩이 낳은 막내동인데, 암만해도 제 복(福)과 집안복을 같이 타고난 듯하다는 말도 건냈다. 날때부터 복을 입어 제아버지가 군납업으로 터를 잡고 일어서더니, 아이가 다섯 살 나던 해쯤, 크게 번창해서 오늘날까지 보란 듯이 떵떵거리며 살게 됐노라 했다. 그리고 걔만 귀여워해 주면 구자판은 매우 기뻐하며 돈을 내줄 터이니까, 아까 나를 대할 때 버릇없이 망언한 것을 눈감아 주면, 앞으로도 집안끼리 잘 지낼 거라는 귀띔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이 할멈이 지나친 노파심으로 남의 일에 간섭하는가 싶었지만, 우리집 내력도 잘 아는 처지라길래 그야말로 너그럽게 들어뒀다. 결국 그날은 그 까까머리 녀석에게 어이없이 몇 차례 더 당하고 돈도 못 받은 채 물러나오고 말았다. 나중에 구자판이 통지를 하긴 했는데, 사람을 공 기다리게 한 사죄도 없이, 그 몇푼 안되는 보상금을 몇 번에 쪼개 보내야겠다는 치사한 수작만 늘어놓았다. 정말 후안무치(厚顔無恥)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뿐 아니라, 시가지(市街地)에 있는 우리 공터를 그가 비공식적으로 가끔 빌려 쓰던 것이 또 있었는데, 그것을 아주 차제에 일부만 분할 양도해 주면 그 대지위에 큰 건물을 세워 함께 운영하며 공동관리하자는 제의를 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일방 그 귀퉁이 일각만은 이미 저희 명의로 등기를 올리려고 수속 중이라는 것도 통고해 왔다. 그러나 어차피 그동안 그 대지를 우리가 맡아서 지키지 못한 탓으로 그들이 오히려 점유권(占有權)을 주장하고 나서는 까닭에 할 수 없이, 교환조건으로 전답 처분대금은 꼭 갚고〈빌딩〉을 지어 갈라 쓰자는 약속을 받고 물러섰다. 요새처럼 빚받기 어려운 세상에 어쩌면 그렇게나마〈바아타〉를 하는 폭이 낫다는 게 우리 집안 어른들의 지론이었으나, 나로서는 어지간히 부화를 치미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해묵은 감정에만 맺혀 왕래를 끊고 상종을 않으면 이처럼 급변하는 세상에선 오히려 손해나 보기 쉬우니 두루 잘 사귀는 게 나을 게라고, 몇몇 동리 할멈들이 말참견을 하고 껴들어서 내심 아니꼬움을 참느라 무척 힘들었다.

Q서 유치장에 수용되었던 동안 나는 몇몇 친구들의 인상적인 말을 되씹어 가며 실로〈데모〉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해 숙고해도 보았다.

L은 본래 관록있는〈데모〉선봉장이기도 했지만 그 이론에 있어서도 타의 도전을 불허하는 짜임새와 타당성이 밑받침하고 있었다.

- 우리는 현재 학생이지만, 동시에 역사의식을 가진 지성인이요, 앞날의 시민으로서 당당히 현실에 참여를 해야하는 걸세. 엄청나게 빗나간 현실이 우리를 점점 더〈데모〉나 단식과 같은 과격하고 극단적인 방법으로 이끄는 거야. 물론 현실적 상황의 부조리가 비정치무대인 대학 내에까지 부작용을 미쳐 많은 화를 입히는 건 안됐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그 만행에 눌려 현실에서 물러날 수는 없지. 현시점에서〈데모〉는 필요악(必要惡)이야. -
이에 비하면 열혈적(熱血的)인 행동파 M은 약간〈애너키스트〉같은 경향이 있어서 말도 여간 과격한 게 아니었다.
- 나라도 팔아먹는 판국에〈데모〉아니라 무언들 못하간? 깡그리 밀고 들어가서 그 흑심을 백일하에 까뒤집어 내야쟎간? 암, 그렇게 굽실대며까지 평화선을 내줘? 받는 건 쥐꼬리만큼 받아 쥐고. -
반면 매우 건설적이고 온순한 성품으로 덕망있는 수재인 N은 총명한 이지가 앞서는 회의 비판파여서〈데모〉는 하지 않았지만 그 목적엔 찬동했다.
- 동기가 무엇이건 과격한 과정을 밟아서는 결코 건설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없어. 과격한 수단으로 목적을 달성한다거나, 강경한 조처로 그 수단을 막는 반작용도 모두 역사와 양식 앞에 비판받아야해. 극(極)은 극을 낳는 악순환만 되풀이하네. 현실참여는 가장 긍정적으로 시작을 해도 많은 부정(否定)을 낳게 마련이야. -
그러나 놀랍게 대부분의 무관심파들은 거의〈니힐리스트〉가 되어 있었다.
-〈앙가쥬망〉이건〈데가쥬망〉이건 그건 모두 어떤 목전의 공리를 두고서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세속적 행동이야. 나는 좀더 관망하며 소극적인 계층에 자유로이 머물러 있겠어. -

내가 마지막「데모」를 했던 날은 하늘도 잔뜩 찌프려 있었다. ○○집행식과 성토대회를 마치고 대열에 앞장서서 나갔다. 저만치 경찰「스피커」가 달린 가두선전차 옆에서 초췌한 모습으로 튀라구 손짓을 하며 진두 지휘를 하는 금테가 있었다. 눈여겨보니 아버님이었다. 더할 나위 없이 초췌한 모습이었다.

연이은 비상근무 탓인가? 나는 다시 눈을 부비고 살폈으나 역시 초췌하다 못해 처량한 모습이었다. 아버님이 이렇게 처연해 보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전에도 이처럼 만나면 언제나 금색「뱃지」와 금테가 휘황하고 풍채도 당당한 아버님이 아니었던가? 어떤 때는 보기만해도 공연한 증오감이 치솟는 비만형(肥滿型)이었는데.

그렇지만 나는 이런 자리에서 사감(私感)에 사로잡힐 수 없었다.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달려 나갔다. 그 순간 나는 아뜩하는 충격을 뒷머리에 느끼며 쓸어졌다.
희미한 광선 속에 살아오는 모습은 여간 처량한 표정이 아니었다. 나는「베드」에 뻗쳐져 있었고, 그 앞서 사복을 하신 아버님이 울상이 된 어머님을 달래며 나를 살피고 계셨다.

퇴원 후 며칠간 아버님과는 별 접촉을 할 필요도 없었고 간혹 면대(面對)를 해서도 나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한주일을 보내자니 참으로 불효하는가 싶은 괴로움이 가슴 속에서 우왕좌왕 끓어가고 있었다.
참다못해 나는 아버님께, 외람되게 아버님께 술을 좀 사주십사고 청했다. 광화문에서 당주동길로 접어들다가 어느 군참새집으로 찾아 들어갔다.

몇 순배를 나누고 따근한 청주로 취기가 오르자 아버님은 새대가리를 아짝 씹으시며 말문을 떼신다.
『대학생놈이 공부나하지〈데모〉는 무슨〈데모〉야! 비싼 등록금 내구 자꾸 휴교나 되면 뭐 좋은 게 있어, 임마. (꿀걱)』
『아버님 단지 무력한 학생이나 시민의 평화적 의사표시일 뿐〈데모〉를 뭐 곧 죽을 일이나 만난 듯이 놀라가지고 그렇게 뚜드려 막아요? 정당한 민의전달을 차단하는 까닭부터 우선 알아야겠어요. 조금 탈선을 한다손 치더라도 의사표시의 자유와 당국자로서의 성의있는 반영을 약속하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봐요. 도무지 뭐에 왜 그렇게 지레 겁을 먹는지 모르겠거든요.』
『임마 (꿀걱) 의사표시건 뭐건 민주사회에는 질서가 생명이란 말야. 알겠어?「데모」는 아무래도 학생의 본분이 아니란 말야. 알겠어? 더구나 요즘같이 지지한「데모」는 점점 명분도 안 서는 일이야. 공연히 평지풍파를 일으키지 말구 (꿀걱) 공부에나 몰두하란 말야. 요즘「데모」는 점점「프락치」전술같은 데가 있단 말야. 너두 누구 끄나풀을 잡은 거 아니냐?』
『도대체 요즘엔 가해자(加害者)와 피해자를 가끔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본다는 미덕도 없어요. 이제 와서 상대방의 명분조차 모르겠다고 꾸겨 누르는 수법은「더티·플레이」죠. 애국충정이랬다, 난동이랬다, 최루탄 구토탄(嘔吐彈)에 학원난입 봉쇄로 실컷 만신창이를 만들어서 정말 뭘 막으려던「데모」인지 모호하게 되도록 유도해 놓구, 이젠 끄나풀? 설마「메카시즘」을 드러내시는 건 아니겠죠. 술 걸칠 때만이라도 직업의식은 벗어놔야죠. 진짜 끄나풀이 있긴 많이 있죠. 우리가 소위「영·테로리스트·파아티」라고 부르는 잘 훈련된「사꾸라」들이랑 사복형사나 특무부대원들 같은 학원사찰의 명수들이 다 끄나풀이 아닌가요? 이건 뭐 국교정상화 반대조차 아닌, 단지 조기(早期) 타결이나마, 자세와 이권(利權)을 최대한 고양(高揚)하고 신장해서「이니시어티브」를 잡으라는 얘긴데, 정권타도니 교체니 하고 말도 안될 소리까지 붙여주니, 기가 차요 기가 차.』

이런 식으로 우리 부자간의 대화는 하룻밤을 지내어도 다 못 맺을 지경이었다. 어영부영하다 자리를 뜨니「뚜―」하는 통금예보〈사이렌〉이 울었다. 우리의 대화도 어떤 한계선에 다다른 듯 싶도록 진정되어 있었다.
『결국 이렇게 살다보면 가엾기 짝이 없는 건 네놈과 나 자신뿐이로구나. 모든 세상사는 항상 제 갈 길로만 뻐쳐가는데 (꿀꺽) 그걸 놓고 아옹다옹 하는 네놈 대학생이랑 네 애비 경찰이랑만 딱하게 뭔가에 속아서 뛰고 갈기고 얻어맞고 터지는 것이 아니냐? (꿀꺽꿀꺽) 저 구름은 항상 높은 기류를 타고 흐르는데, 우리는 늘상 이 바닥에서만 살아온 게 아니냐? 난 순경질을 그만 두겠다 그만둬.』

이튿날 아버님은 생계를 위해서인지 심심파적으론지 경찰서로 출근을 하셨다. 그러나 나는 내 몸에서 역사의식이라든가 사명감(使命感) 같은 것이 죄다 거세(去勢)당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또 아직 젋지 않은가 하고 다짐을 해보리만큼 나이가 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대학신문’ 1966년 3월 7일 제635호 신춘문예 가작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