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초 국내에서 언어학의 각 분야 별 연구 모임의 필요성이 느껴지고, 형식문법연구회라는 모임이 시작된 뒤였던, 1982년 말쯤 한국언어학회 이사회에서 당시 편집이사였던 이상억 교수에게 음운론 쪽에도 연구 모임을 만들어 보는 것이 어떠냐는 제의가 있었다. 마침 그런 필요성을 이미 느껴왔던 이 교수는 흔쾌히 동의하고 한국언어학회와 연계 하에 '음운론연구회'를 창립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였다. 음운론은 물론 음성학 및 형태론 영역까지 포괄하는 연구 교류 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같이 모일 만한 모든 해당 학자들의 명단을 우선 작성하였다.

창립 총회를 1983년 2월 22일 2시에 소집하면서 2를 겹쳐 택한 이유를 음운론의 한 바탕이 되는 BINARISM에 근거한 것이라고 하였다. 호응은 당시 외국에서 음운론 분야를 전공하고 온 학자들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국어학의 기반을 쌓으며 새로운 이론에 대한 관심을 가졌던 학자들까지 폭넓게 일어났다. 창립 초기에는 김석산, 남풍현, 이기문, 이명규, 이병건, 이상억, 이정민, 이혜숙, 전광현, 한영희(가나다 순) 교수 등이 참여하여 국어학과 영어학이 거의 반반의 비율로 시작하였다. 대개 최신간 원서나 논문들을 입수하여 강독한 뒤 토의했으며 간간이 회원의 논문도 발표 토론하였다. 원래 언어학 이론의 강독을 비롯하여 국어 자료에 대한 적용까지를 연구회에서 포괄하려는 의도였으나 그 뒤 대개 강독 위주로 흐르게 되었다. 그래서 매학기 5-6회의 격주 강독 끝에 마지막 1회는 특강과 논문발표의 기회를 1일간 갖게 되었다.

장소는 당시 중앙지에 있던 단국대의 영문과 한영희 교수가 넓은 연구실을 제공하여 초창기 요람으로 3년쯤 이용하였다. 그 뒤는 현재까지 대우문화재단의 후의로 재단빌딩 세미나실을 사용하고 있다. 방학 기간을 제외하고 격주 토요일 오전 10시 반에서 1시로 모임을 가져 왔고, 초기에는 한남동 미향촌(한식집), 중간에는 신사동 옛골(족발집), 현재는 대우빌딩 지하 만다린(중국집)에서 점심을 나누고 차도 든 뒤에 헤어지는 전통이 생겼다. 또 한 학기 한번은 서울 이외의 지역으로 가족적 여행 모임을 시작하였는데, 당시 충주호 담수로 좀 더 잠겨 가던 도담 삼봉을 보기 위해 단양팔경을 다녀온 추억 등은 지금도 입에 오르내린다. 그 뒤 이 여행 모임은 지방 소재 대학이 한 학기 한번 회원들을 초청하여 강독회를 여는 형식으로 정착하였다. 그 때마다 해당 대학 회원의 극진한 대접을 받고 오는 민폐도 본의 아닌 관습이 되어 가고 있다. 각 학기 마지막 특강 집회도 회장이나 총무들의 재직교에서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초기에는 모임 통보 및 진행의 심부름을 이상억 '당번'(당시는 대표나 회장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고 그런 의식도 갖지 않았다.)이 85년 6월까지 담당하였다. 이어 92년 6월까지 김영석 회원이 대표로 연구회를 성장시켰고, 94년 6월까지 안상철 회원, 98년 6월까지 조학행 회원, 2000년 6월까지 김기호 회원, 그 뒤 현재까지는 강덕수 회원이 회장 임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 그 동안 경험으로 보아 회장직은 2년 단임으로 되도록 많은 회원들이 책임을 돌아가며 맡아보아야 회장의 새 임원진이 된 여러 구성원들과 함께 학회에 대한 애정과 성의를 모두 많이 가질 수 있게 된다는 불문율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회장 후보는 이혜숙, 한영희,전상범, 이명규, 정국 원로회원과 전임 회장단으로 구성된 자문위원단에서 추천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그 동안 이 모임의 강독 교재로 Papers in Phonology and Morphology 3권(범한서적)과Phonology and Morphology 27권(한신문화사)까지를 발간하여 왔다. 이렇게 모임의 활동이 주로 강독에 치우쳤기에 논문 발표 및 정보 교환이 더 활성화되기를 바라오던 이상억 회원은 1993년 창립 10주년이 됨을 기념하여 '음성·음운·형태론 연구'란 논문집의 발간을 발의하여 20편의 논문이 묶여지게 되었다. 이 첫 발간은 정기 간행을 전제로 시작한 것은 아니나, 그 뒤 계속 발간의 필요성이 인식되어 편집위원회가 구성되었다. 평소 강독 토론을 거쳐 넓혀진 식견이 국어를 비롯한 여러 언어 문제 연구에 계속 적용되어 현재 6권 1호까지 많은 논문을 모아 발간하였다. 지난 1999년 이후 매호 발간시 20만원씩 1년에 40만원을 세종-ICKL 기금에서 지원하고 있다. 이 기금은 미국 조지 워싱턴대 김영기 교수가 1992년 동 대학에서 8차 국제한국언어학회(ICKL) 개최시 발간했던 영문 논문집 <세종대왕>의 발매로 조성한 재원이며 이상억 회원이 관리하고 있다.

한편 1996년 9월 학술진흥재단에서 지원하는 학술지의 자격 요건에 맞추기 위해 '음운론연구회'를 부득이 '한국음운론학회'로 개명하였다. 2000년도에는 '음성·음운·형태론 연구'가 지원 대상 등재 후보로 선정되어 앞으로 지원금도 받고 수록 논문의 평가도 공적인 인정을 받게 될 것이다. 학회로 개명은 하였으나 초창기의 진지하게 '연구'하는 모임으로서, 회원 수보다는 질적 수준 향상을 지향하는 자세를 견지하려 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한 분야의 전공자들만이 격주의 빈도로 자주 정기적 모임을 갖는 예가 드물고 그것도 18년이나 꾸준히 계속해 왔다는 역사는 자긍심을 가져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 바탕에는 108명(1993년 당시까지 연인원)에서 179명(1999년말 재정리된 회원)에 이르는 회원이 밑받침을 하는 것이며, 그중 외국(대부분 미국) 박사가 52명(1999년말 현재)에 이르는 실력 자체가 기둥이 되어 왔던 것이다.

학회 발표 논문집 또한 근래에는 오슬로 학회(2002), 베를린 학회(2003), 터키 안탈랴 학회(2004), 인도 뉴델리-서울 학회(2005)에서 발표한 논문을 모아 출판했다. 오슬로와 터키 정기학회에서 발표된 논문들은 (1) Exploitations in Korean Linguistics (Iverson 등 편집, 2002)과 (2) Inquiries into Korean Linguistics I (이상억 등 편집, 2004)에 게재되었다. 차후 정기 학회 후 내는 논문집은 Inquiries into Korean Linguistics라는 같은 제목을 갖도록 했다. 2년마다 만나는 간격이 너무 길다는 의견들에 따라 중간의 홀수년에도 작은 모임을 갖도록 이상억 회장의 제안으로 시작된 정기학회 사이의 소규모 모임인 베를린과 인도-서울 학회 (2005년 10월에 2번 만남) 내용은 두 권의 공간된 출판물, (3) Korean &/or Corpus Linguistics Proceedings of ICKL-TU Berlin International Conference on Korean Linguistics, 21-22 July 2003 (이상억 편집, 2003)과 (4) ICKL창립 30주년 기념논문집: 촘스키의 최소주의이론 및 최적성이론의 한국어에의 적용, (이상억 편집, 2005)을 탄생시켰다. 국제 한국 언어학회 창립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상억의 주선으로 그 첫 번째 모임인 ICKL-JNU International Conference on Korean Linguistics를 2005년 10월 8일 인도 New Delhi에서, 두 번째 모임을 국내에서의 학회창립 30주년 기념행사로 서울대에서 10월 22일에 개최하였다.

80년대에 유행하는 신사고 방법 가운데 하나는 인지과학 내지 컴퓨터 분야 등에서 쓰는 신경망(neural network)접근 방법이다. 이 방법은 굳이 主義를 붙여 명명하면 연관주의(connectionism)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단위가 조직망 속에서 그 이웃 단위들과 어떤 연관 하에 활동하는가를 파악하자는 원리다.

1992년 미국언어학회 여름학교의 한 강좌는 이 원리를 언어학 연구에도 적용하여 심지어 모음조화 현상까지 이 방법으로 설명해 보려는 내용이었다. 진정 현대 사회는 모든 요소가 다 연관성을 가지고 움직여 나가기 때문에, 이러한 연구 방법이 나의 전공분야에까지도 삼투되어 온 것이다. 커넥셔니스트의 관점에서 보면 결국 그 원리가 많은 학문분야에 두루 다 영향을 끼치리라고 예견할 것이다.

일찌기 학제간(interdisciplinary)이란 용어가 유행하며 기성 학문 영역사이 사이의 빈 구역들을 탐색해 보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빈 틈만이 아니라 접면(interface), 공유 영역을 겨냥하여 여러 종류의 합성어적 학문들이 등장했다. 전산언어학·사회언어학·심리언어학 등이 그런 예들이다.

그런데 이런 대세를 역행하여 모듈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문제를 일으킨다. 가령 나제대결을 재현하는 듯한 지역감정 문제나, 공산당이 그 종주국으로부터도 증발해 버리는 시점에 연관의식이 없이 고수되는 주체사상, 또 그를 맹종하는 일부 학생의 비연관주의적 감각은 고립과 부조화를 자초하는 것이다.

다시 학문 영역으로 돌아가서 교내의 기구가 모듈화될지도 모를 듯한 예를 들어 보겠다. 가령 한국학을 진흥시켜 보다 많은 외국인이 이 분야를 연구하는데 참여시키자는 노력이 있어 왔다. 한때는 국제대학원이라는 기구까지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 안에는 분명히 각 지역 외국 학생이 들어와 한국어도 배우고 한국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제 분야를 연구할 수도 있게끔 구상되었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그 안은 무산되고 새로 태어난 기구가 지역연구종합센터다. 유감스럽게도 이 센터는 대외적인 각 지역만 다 망라했을 뿐 정작 한국이란 지역을 제외하였다.

물론 이미 한국문화연구소가 있고 어학연구소 한국어과정이 있다. 그러나 원래 국제대학원 구상에서 계획하였던 유기성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 경우도 연관주의적 비젼으로 서로 inter-institutional 프로그램을 추진해 보는 일도 필요할 듯도 하다. 아마도 그것이 모듈로서 총립된 기구만 가진 대학에 신경망을 짜 넣어 생기를 불어 넣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새 기구를 자꾸 양산해 내지 않고도 효율적 활동을 도모할 수 있는 방법이 되기도 할 것이다.

한국학 얘기가 나온 김에 한가지 더 지적하자면, 국제교류위원회라는 기획실 관장 기구에 정작 한국학 관계 교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학문적 국제 교류에서도 수입적자만 쌓자는 것이 아니면, 당연히 한국학은 가장 대표적 수출 품목인데, 아무 회원도 이 분야를 대표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어는 누구나 하는 것이니까 어떤 교수건 일가견이 있다고 말한다면, 국어학은 빼자(물론 이런 망발이 우리 대학 내에는 없겠지만) --그러나 국사며, 국악이며, 그 모든 전문 분야를 이렇게 말할 수는 없으리라.

차제에 나는 한국학을 잘 수출하는 일이 결국 우리를 세계 속에서 고립시키지 않고 조화롭게 살릴 수 있는 길이라고 비약적 결론을 내려두고 싶다. 그런 노력으로 나는 어학연구소에서 미국 UCLA와 호주 그리피스 대학에 한국학을 송출하기 위한 위성통신 강의를 1990년부터 실시하고 있고 곧 캐나다와 하와이나, 알래스카로도 통신망을 넓힐 구상이다.

서울대학교 교수이고 한국언어학계의 중진교수인 이상억 동문이 최근 한달 가까이 미국 언어학회를 참석하고 서부를 여행하였다.

미국 Univ. of California at Santa Barbara 미언어학회LSA Institute에 3주간 가서 공부하며, Bernard Comrie 교수에게 현재 진행 중인 '한국어 계통의 유전공학적 연구'에 대한 자문을 받았다. 앞으로 컴퓨터언어학회 Coling을 주관할 Huang Chu-Ren 박사와도 교류 협조하기로 하여, 우선 9월말 본인(이상억) 편집으로 '박이정'에서 출간된 "계량언어학"지에 중국 코퍼스언어학을 소개하는 글을 받았다. 뒤이어 1주간은 New Mexico, Arizona, Utah, Colorado의 Four Corners(미 주경계가 십자로 만나는 유일한 곳) 지역을 여행하며 각종 감탄사를 남발했다.

이상억 동문에 대해서는 그의 최근 저서(1998) "서울의 한옥"(홍문 섯골 이벽동 댁: 한림 출판사 간)에 대해 몇마다 덧붙이는 것이 도리일 것같다. 바삐 사는 서울의 현대인들은 남이 쓴 책을 자상히 살펴보지 못하는 습관이 있는 것같다. 그래서 이 동문의 이 책도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을 잘 살펴보면 상당한 가치를 가진 명저이고 큰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책은 이 동문이 태어나서 자라난 자신의 옛집을 그리워하며 그 집의 설계와 구조 및 과거의 실제 생활 상태를 밝혀놓은 것인데, 부모님의 회혼을 맞아 증정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집을 지은 사람은 이승업이며, 경복권 중건시 도편수라는 것이다. 이 집은 결국 제 자리를 떠나게 되었으나, 지금 남산 한옥마을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동문들께서는 남산 한옥마을로 나들이 할 기회가 있으시면, 어느 집이 이상억 동문의 춘부장이신 이영우 옹의 집인지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서울대 문리대 64년 입학동기 동창회 소식]

이상억 동문(서울대 인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이 지난 해 12월 19일 서울시로부터 제 55회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다. 인문과학 부분이다. 익재 이제현의 후손으로 한양 천도 이후 서울토박이인 이 동문이 쓴「서울말 진경구어 연구」「서울말 연구」 등의 저서가 한국어, 그 중에서도 특히 서울의 토박이 말에 관한 연구란 점이 서울시 문화상의 취지에 제대로 부합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예컨대 “…을깝쇼, …습죠” 등의 서울 하층계급 어법의 연구로부터 흔히 말 도중에 쓰이는 “말이야, 가지구, 그래설라무네” 등의 상투어구 출현 환경 등을 연구했다. 이 밖에 염상섭 유진오 한무숙 등 서울 출신 작가의 소설에 나타난 서울의 옛 말씨와 표현을 찾아낸 업적도 공적으로 인정받았다.

또 다른 저서 ‘서울의 한옥’이란 책은 서울의 솜씨있게 지은 한옥의 건축적 배경과 그 안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의 생활상에 대한 보고서 겸 사진첩으로 19세기 말부터 서울의 생활상을 자세하게 기록한 거의 유일한 민속 생활사의 실증적 자료로 평가받았다. 이 책에는 19세기 경복궁 중건 대 도편수로 일했던 이승업이 직접 살기 위해 지었던 집으로, 1889년 이 동문의 증조부가 매입한 후 이 동문이 태어나서 자란 집의 사진과 기록이 실려있다. 원래 광교 옆 구 조흥은행 본점 뒤 삼각동 ‘홍문섯골 이벽동댁’으로 보존돼 오다가 현재 지하철 충무로역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남산골 한옥마을로 옮겨져 옛날 찻집으로 쓰이고 있다.

이 책 109쪽에 실린 진관사 5층 석탑은 이 동문의 증조모께서 시주해서 건립한 것으로 탑 중허리에 부처의 채색도가 들어 있어 과거 어느 때인가는 한국의 돌탑들이 채색되었다는 가설을 입증해 주는 유일하고도 귀중한 자료이다.

동국제강 본사가 80년대 이후 자리잡은 수하동의 현 사옥은 역사가 깊은 곳으로서 과거에 무엇을 하던 곳인가 알아둘 필요가 있다. 다행히 동국제강은 사옥보다 공장 현장에 더 투자하는 건실한 경영 방침으로, 과거에 세워진 학교 3층 건물 및 강당의 원구조와 교정(校庭) 모습을 그런대로 간직하고 있다. 서울 시내 최중심부에서 이만큼 옛 건물 모습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곳도 드믈 것이다.

현 중구 을지로 입구 수하동 50(64로도 나옴)번지 일대 옛 청계국민학교 자리에는 조선의 관청인 도화서(圖畵署)가 있었는데, 원래 중부 견평방(堅平坊) 즉 종로구 견지동(전 한성도서주식회사 뒤쪽)에 있었다가 남부 태평방(太平坊) 즉 중구 수하동으로 이전했다. 도화서는 그림의 교수(敎授), 고시(考試), 제조, 보관 등 그림에 관한 일을 맡았는데 역대 왕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처음에는 도화원(圖畵院)이라 했다가 후에 도화서라고 개칭했다.

아래에 밝히겠지만, 청계국민학교의 전신인 수하동소학교가 시작된 것이 110년전 1895년 9월 10일이다. 110년은 웬만한 흔적은 사라지는 긴 세월이다. 필자는 미국에서 5년 공부, 호주에서 4년 교수를 했었기에 그런 역사가 짧은 나라들에서는 110년이라면 특히 큰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청계국민학교의 1957년 48회 졸업생으로, 이 글을 쓰게 되어 동국제강이 옛 학교의 골격을 그대로 보존해 온 일이 고맙기 그지 없다. 또 필자는 현남산골 한옥마을 이승업가(옛날 찻집)의 원 위치인 삼각동 36번지(수하동 북쪽 건너편)에서 이 학교를 다녔고, 집안에서 아버님을 비롯한 7분 삼촌, 우리 4남매가 다 같은 졸업생인 까닭에 더욱 의의가 깊다.

아버님(李暎雨)은 1917년생(현재 88세)이시며 1924년 4월에 수하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셨는데 당시는 4년제로 교무실 1개, 교실 8개의 일본식 목조 단층집 일자형(一字形) 교사였으나, 1930년 3월 졸업시까지에는 5, 6학년이 더 생기고 각 학년 2반씩 교실도 12개가 되어 T자형(T字形) 2층집으로 1928년 이전에 증축되었다 하셨다. 학생은 남자만으로 구성되었었고 조선어(1주 약 3회), 국어(일본어), 산술, 수신(도덕), 도화, 습자, 음악, 체조 등의 과목이 있었으나 사회, 자연은 별도로 가르쳐지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셨다. 이 자리에 3층 ㄱ자형(ㄱ字形) 현교사의 골격이 선 때는 30년대 후반쯤이었을 것이다. 학교 북측 삼각동과 면한 소위 소광교(小廣橋) 길은 복개 전이어서 개천물 흐르는 것이 보였으나, 운동장 앞 정문 쪽 동측 길(현 외환은행으로 가는 길) 개천은 이미 복개가 되어 물이 보이지 않았다고 하셨다.

“소학교, 보통학교, 국민학교, 초등학교”---초등교육 기구 명칭 변이의 역사

한국의 초등학교 역사는 초등수준의 교육기관이라는 점에서 보면 고구려의 경당(?堂), 고려시대·조선시대의 서당(書堂) 등이 그 기원이라 할 수 있다. 민간인에 의해 설립된 사학은 1883년 개항장 원산에 설립된 원산학사(元山學舍)가 최초로서, 이는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학교이기도 하다. 이 학교는 덕원부사 정현석(鄭顯奭)과 덕원부민이 협력, 근대교육을 실시하기 위하여 문·무반으로 나누어 근대적 교과목을 설정하였다.

그러나 근대적 초등교육은 갑오개혁 이후 신제도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생긴 ‘소학교’에서 시작되었다. 법제상 근대학교의 제도가 수립된 것은 고종 31년(1984)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의 일이다. 종래의 문교행정을 담당하던 예조가 폐지되고 학무아문(學務衙門)이 설치되었으며 과거제를 폐지하였다. 7월에는 학무아문 명의로 고시를 발표하여 영재교육의 시급함에 따라 소학교와 사범학교를 서울에 설치할 것과 장차 대학교·전문학교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설립할 것을 알렸다. 이듬해에 고종은 〈홍범14조〉를 선언한 가운데 근대교육을 받아들일 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으며, 이어 교육조서(敎育詔書)를 통해 교육의 중요성을 재천명하였다. 이러한 교육입국의 정신에 따라 정부는 1895년 4월에 교사양성을 위한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식 학교법규 ‘한성사범학교관제’에 의하여 지금의 교동초등학교 자리에 근대교육사상 최초의 관립소학교인 한성사범학교 부속소학교가 설립되었고 (개교 당시의 학생 수는 136명), 1897년에 관립 고등소학교가 되어 서울의 소학교 졸업생들이 시험을 거쳐 입학하였다.

1895년 7월에는 소학교령의 반포를 보게 되어 1895년 8월 1일부터 '소학교령'이 시행되면서 한성에는 수하동소학교(水下洞小學校)를 비롯한 장동(壯洞), 정동(貞洞), 계동(桂洞), 주동(紬洞), 매동(梅洞), 재동소학교(齋洞小學校) 등 8개의 관립소학교가 세워지게 되어, 9월 10일 서울 중구 수하동 50번지 옛 '도화서'터에 수하동소학교가 설립되었다. 개교될 때 학생 수는 장동소학교가 23명, 정동소학교가 76명, 계동소학교가 40명, 묘동(주동)소학교가 48명이었다. 광무 4년 1900년의 서울의 소학교로는 수하동·장동·정동·재동·주동·교동·양사동(養士洞)·미동(渼洞)·양현동(養賢洞)·안동(安洞)의 10개교였다.

소학교령에 의하면 소학교는 관립, 공립, 사립의 세 종류로 하고, 각 부(府)· 군(郡)에는 그 관내에 학령아동의 취학할 공립소학교를 설치하여 각 도(道)에도 37 개의 관찰부 소학교가 설립되었다. 1900년에는 62교가 되어 이 학교수는 소학교령이 반포되던 시기에 비하면 상당한 증가를 보이고 있으나 그 증가 속도와 비율은 저조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소학교의 취학연령은 만 8세에서 15세로 했고, 교육과정과 수업년한은 심상과(尋常科) 즉 보통과 3년에, 고등과(高等科) 2년으로 하였다. 보통과는 수신·작문·습자·산술·체조 등을 가르쳤고, 여학생을 위해 재봉을 가르치기도 했다. 고등과는 보통과의 교과목 이외에 한국지리·역사·외국지리·이과·도화·외국어 등을 추가하여 그 중 1과목을 더 선택할 수 있었다.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된 후 일제의 간섭아래 소학교령이 고쳐져 광무 10년 1906년 8월 27일에 공포된 '보통학교령'에 의해, 소학교의 명칭은 ‘보통학교’로 바뀌었다. 동시에 심상과와 고등과를 폐합하여 수업연한은 과거 소학교의 2~3년에서 4년으로 길어졌고, 학기를 3학기로 하며 보통학교 정규과정 위에 2년제의 보습과(補習科)를 둘 수 있게 했다. 교과목에 있어서 일본어를 한국어와 같은 비중으로 과하고 교과서는 일제 간섭 아래 편찬된 것을 사용하게 되고, 실과(수공·농업·상업) 등이 추가되었다. 한편 융희 4년(1910)에는 서울의 관립보통학교를 모두 공립보통학교로 개편을 보게 되었으나, 1910년 8월 현재 보통학교수는 관공립이 59개교, 준공립이 73개교, 사립이 36개교로 도합 168개교가 되었다. 여기에서 준공립은 소위 보조지정(補助指定)보통학교를 말하는 것으로, 보조지정보통학교는 사립학교로서 학부(學部)가 그 시설과 교육내용이 어느 정도 상당하다고 인정하여 학부에서 일본인 교원 1명과 한국인 교원 1명 내지 2명을 파견한 학교를 말하는 것이다.

보통학교의 명칭은 1911년 8월에 발표된 '제1차 조선교육령'에도 그대로 사용되었으나 4년제 ‘보통학교’와 4년제 ‘고등보통학교’(남학교와 여학교로 구분)로 나뉘게 되어, 보통학교만이 초등교육 단계에 해당되었다. 이에 따라 수하동소학교도 수하동공립보통학교라는 명칭으로 개교했고, 1930년 9월 1일 청계공립보통학교로 개칭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한편 일본인 자녀들은 원래 조선인들이 다니는 보통학교와 구분하여 ‘소학교’라 불리는 초등학교에 입학했었다. 1926년 7월 1일 '소학교령'에 의해 보통학교와 (일본)소학교의 구분이 없어졌다가, 1938년 교육령 개정으로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라는 명칭으로 바뀌었으며, 수업연한도 1934년 4월 1일 이후 심상소학교 6년제로 연장되었다.

1941년 3월 31일 일왕의 칙령 '국민학교령'에 의해 학교 명칭이 '황국신민의 학교'라는 의미의 국민학교로 변경 개칭되었다. 이는 '충량한 일본국의 신민(臣民), 곧 국민(國民)'을 만들려 했던 일제강점기의 일관된 초등교육정책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 명칭은 8·15해방 이후에도 행정편의 등의 사유로 반세기 가까이 유지되어오다가 (1956년 2월 9일에 청계국민학교로 개칭) 1995년에 와서야 명칭 개명 논의를 거쳐 민족정기 회복 차원에서 1996년 3월 1일부터 초등학교로 개칭하기에 이르렀다.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한국브리태니커, 2001 등 참고.

50년대 후반 도심의 다동, 무교동 및 삼각동, 수하동 등에 요정 무제한 허가정책이 시행되니 취학 아동을 가진 야간 거주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60년대 이후 도심에서는 이에 따른 소학교의 소규모화와 통폐합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중앙지에서 청계국민학교를 비롯하여 수송, 종로국민학교 등이 해당되어서 많이 줄었다. 청계국민학교는 1969년 2월 5일 제60회 졸업식을 끝으로 졸업생 10,440명을 배출하고 남은 학생은 1969년 11월 5일 도심지 개발에따른 학생수 감소로 폐교하면서 분리 수용되고, 현재 졸업대장은 남산초등학교에서 보관하면서 증명서 발급 사무를 대행하고 있다. 그 뒤 25년이 지나 1990년 11월 7일 노원구 중계3동 513-1에 교사를 착공하여 1991년 10월 30일 서울청계국민학교(교명계승) 설립을 인가 받았다. 1992년 5월 6일 서울청계국민학교 개교식이 있었고 1996년 3월 1일 청계국민학교를 청계초등학교로 개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