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키모 언어 속에는 눈(雪)에 대한 어휘가 다채롭게 발달되어 있다. 갓 내려서 사박사박한 눈, 얼음집을 만들기 좋게 약간 굳은 눈 등등으로 10여개 단어가 구별되어 있다. 우리 말로는 길게 표현해야 할 개념들이 한 단어에 담겨 있다. 한편 우리말에는 눈, 진눈깨비 정도의 말이 떠오를 뿐이다. 따지고 보면 진눈깨비도 '눈'에 '진'과 '깨비'가 앞뒤에 붙어 이루어진 복합어이다. '진눈, 마른눈'이 대조가 되어 발생된 것이다. 가루눈, 함박눈, 밤눈, 도둑눈, 첫눈, 풋눈, 소나기눈, 싸라기눈 등 아무리 찾아 봐도 모두 복합된 말뿐이요 한 개의 단순어는 아니다.

각개 언어는 그 말을 쓰는 사회의 특성에 따라 발달한다. 에스키모어는 그들의 생활에 가장 필요한 어휘는 다양하게 가지고 있으나, 물론 현대적 첨단 과학용어는 별로 발달되어 있지 않다. 한국어가 에스키모어보다 적어도 컴퓨터에 관한 어휘는 더 많이 쓰고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각 언어들은 자기 사회에 자족(自足)하는 체계로서 존재하는 것이며, 결코 다른 언어와 우열을 비교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에스키모들이 한국과 같이 전자공업의 발달을 보지 못했으므로 불완전한 언어를 쓰고 있으리라는 추측을 한다면 큰 오산이다. 언어학에서는 각 언어들을 우수하다, 아니다로 비교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에스키모인들이 현대 문명의 수준에서는 뒤떨어져 있을지 몰라도, 언어 문화 자체가 미개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요즘도 '한글이 우수하다'라는 말을 하면서 이 속에 마치 한국어가 다른 언어보다 특별히 우수하다는 뜻을 포함해서 쓰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글이 우수하다'는 말을 한글이란 문자체계가 우수하다는 뜻으로 쓰는 것은 조금도 잘못이 없다. 한글은 음성기관을 상징한 문자로서 세상에 유래가 없는 독특한 조직을 지닌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자가 우수하다고 해서 그 언어 자체가 우수한 것은 아니다. 언어와 문자는 별개인 법이다. 이 세계에 문자가 없는 언어는 오늘날에도 허다하다. 한글날을 기념하며 우리가 문화민족임을 되새기는 일은 사실 정확히 말해 문자에 대한 자랑에만 그쳐야 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많은 교사들까지 한국어가 우수한 언어라는 식으로 근거 없는 국수주의적 교육을 자행하고 있다.

'한글'이란 용어를 문자만 가리키는데 쓰지 않고 한국어란 언어를 가리키는 데도 쓰는 일부 학자들의 그릇된 습관이 이런 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교사나 일반인들은 별로 반성 없이 이 잘못을 따르고 있고, 후진국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국수주의가 이런 분위기를 북돋워 주고 있는 꼴이다. 우리 한국어가 다른 언어보다 우수하다 아니다 하는 관점이 아니라, 한글의 우수함은 곧 문자의 우수함일 뿐이다. 언어로서는 현재 세상의 어떠한 언어도 더 우수하다는 말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한글날에 되새겨 보자.

지난 5월 6일에 있었던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에 대한 공청회를 참관하고서 느낀 안타까움은 우리가 정보화 시대에 살면서 사용자 위주의 배려를 하는 데 아직 미숙하다는 점이었다. 쓸만한 표기법이 갖춰야 할 요건은 그 속에 더 많은 정보를 담으면서 사용하기도 쉬워야 한다는 이중적·복합적인 것이다.

‘한글 파동’을 겪으면서 현재의 형태 음소적 한글 맞춤법이 정착된 이유는 독해력을 높이는 정보를 많이 담으면서도 이미 국어를 잘 아는 사용자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면 좋다는 공동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독해할 사용자의 입장을 위해 표기자가 많은 노력을 들여 복잡한 받침까지도 써 넣는 방식이었다. 이미 국어를 잘 말하는 대다수 독자로서는 발음에 큰 지장이 없었다. 또한 다수 독자가 소수의 표기자(필자) 덕을 보기도 하였다.
우리 국어는 본래 문법적 정보를 많이 표기하면 발음하기가 어렵다. 당장 문법적 정보가 필요한 경우가 아닌, 즉 뜻을 독해할 입장이 아닌 외국인들을 위해서는 표음 위주의 로마자 표기법이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발음한 결과를 우리가 쉽게 알아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읽고 듣는 언어 사용자 쌍방이 다 배려된 방안인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표음 위주의 표기법이 기록해 내기에 쉽지 않고 또 만족스럽게 발음을 재현해 내지 못한다는 염려에 있다. 기록하기 어려운 점은 소수의 표기자가 노력을 들이면 많은 사용자(독자)가 그 덕을 보게 되는 원리로 우리가 감수해야 한다. 발음 재현의 불만스러움은 결국 다음에 말할 정도의 차이가 판정 기준이 된다.

공청회에서 음성학 전문가 등을 포함한 많은 분들이 가령 ㄱ, ㄲ, ㅋ 등을 현행 k, kk, k'보다 g, gg, k로 하자는 등의 글자 선택에는 열을 올렷지만, 현행안과 개정 제안의 핵심적 차이가 ‘독립문’을 현행 표음 위주 Tongnimmun에서 전자(轉字) 위주 Donglibmwun으로 고치는 데 있다는 점을 간과하였다. 현행안을 포기하면 단순히 글자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표음 위주의 원칙도 없어지는 것이다.

누구에게 물어 봐도 자음 동화 및 중화 현상 등을 반영한 현행 표음주의 표기법이 원발음을 재현해 내는 정도가 탁월하게 높다고 할 것이다. 새 제안은 그 정도가 감히 비교도 못 할 지경으로 낮다는 것을 제안자들도 너무 잘 알 것이다(예. 벚꽃, 현행 ptkkot : 개정안 bejggoch 또는 beojggoch.).

로마자 표기는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좀더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도로 표지만, 도서관 목록, 여권 등에서 실제로 한글을 옆에 함께 쓰고 있다. 영어 논문에서도 어떤 용어가 처음 나온 위치 또는 끝의 대조표 속에 한글과 로마자를 병기하는 것이 관례다. 결국 이러한 용도에서는 현행 로마자 표기 부분이 발음 기호로서의 역할을 하는 편의가 있다. 완벽한 기호 체계란 어차피 불가능한 것이며, 상대적으로 우월한 정도의 역할을 하면 충분하다. 만약 이 자리에 새 제안대로 전자법을 쓰면 그 결과는 한글을 이중으로 또 적은 꼴밖에 안 되는 터이다.

1984년 현행 로마자 표기법 제정 때 관여한 필자는 현행안 가운데 기호가 쓰이는 부분을 없애야 미구에 닥칠 전산화 시대에 편리할 것이라는 주장을 이미 한 바 있다. 다시 대안도 졸저 “국어 표기 4법 논의”에 수록되어 있듯이 나름대로 제시해 보았다. 그러나 현행안은 기호를 그대로 안고 쓰는 화근을 지니게 결정되어 전산화에 적잖은 짐을 지우게 되엇다. 물론 기회 삽입이 번거로운 정도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표음 위주의 현행안이 1대1 대응을 이용하려는 전산 작업에는 부적합하다는 데서 이번 개정의 불씨가 일기도 한 것이다. 전자법으로 하면 내국인이 주로 쓸 대량의 국어 자료 처리를 전산화하기 쉬워지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문제를 사용자 위주의 관점에서 처리할 슬기를 발휘했으면 한다.

왜 로마자 표기법이 용도에 완연한 차이에 따라 두 가지가 설정되면 안 되란 법이 있는가? 전산 자료 처리용으로서는 새로 제안된 개정안이(현행안과 병행해서) 필요하다. 그렇지만 그 제안 중에 제 2안이 ‘ㅔ’를 e에 배정한 것은 표음적 배려라 볼 수 있는데 ‘ㄹ’은 동일한 2안에서 r과 l 둘 다 쓰는 표음 위주로 하지 않아, 결국 제 1안과 서로 뒤바뀐 자기 모순을 보이고 있다. 아울러 -(경계 표지)를 줄이기 위해서는 ㄲ 등을 kk 등으로 또 ai를 ae로 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점은 이미 알려진 바다.

로마자 표기 개정이 외국의 지도상에 지명 표기하는 일까지 공연히 혼란하게 하고, 또 외국에서 고군분투하는 도서관 한국 사서들을 망연자실케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외국의 대부분 한국학자들은 전자 우편으로 현행안을 따르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우리는 그렇지 않아도 ‘밀어붙이는’ 개혁 속에 꽤 많은 합리적 해결책을 묻어 버리고 더 나은 슬기로운 목소리를 막아 버리는 사회에 살고 있지는 않은가? 필자는 근래 외국 대학에 있으면서 학생들이 잔디밭을 가로질러 다니니까 철망을 치지 않고 또 하나의 지름길을 내 주어 큰길과 지름길이 다 잘 쓰이는 경우를 보았다. 사용자 위주의 합리적 해법이었다.

끝으로 남은 문제점은 상호나 개인 성명 표기에서 이미 널리 쓰여 결코 고치기 어려운 것들이다. Hyundai, Samsung, Daewoo등이 제각가 전세계에 굳혀 놓은 이름을 바꾸려 하지 않을 것이다. 혹자는 자기 이름이 ‘석만’이니 ‘성만’으로 쓸 수 없고, ‘독문’과 ‘동문’을 구별할 수 없으면 큰 혼란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거꾸로 ‘석만’이란 이름도 발음할 때는 ‘성만’으로 읽어야 한다는 정보를 주는 것이 오히려 큰 도움을 주는 면이 있다. 만약 ‘석만’을 항용 일반인들이 자기 멋대로 표기하는 Suk-man 정도로 쓴다면 이 철자가 Suck-man 또는 Sucking man이란 욕설을 연상시켜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망신을 당하며 살게 될 것이다.

로마자 표기법을 다루면서 흔히 쓰는 표현 중에 ‘사대주의’니 ‘무정부주의’니 하는 선동적 용어가 있다. McCune과 Reischauer라는 외국 학자가 만든 체재를 쓰면 그렇다는 것이다. 지금 20세기도 끝나가는 시대에 세계화를 외치는 정부에서 무슨 ‘사대주의’ 운운하며 걱정인가? 우리도 이만한 국력을 갖춘 나라가 되었으면 이제는 합리적인 방안이 어느 것이냐만 객관적으로 판단하면 된다. 남의 나라, 그것도 대국 사람들이 만들었다고 반사대주의의 흑백 논리로 판단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 한글을 모르는 외국인이 읽기에 또 듣기에 좋은 현행안이 마침 외국 학자들의 안을 모태로 했다고 무조건 바꿔야 할 이유가 없다. 그 부족한 기능만 보완하는 별도의 전자법만 더 설정하면 되는 것이다. (한국인, 1997. 7)

'바르고 고운 말'이란 KBS의 텔레비전 프로에서 맞춤법 해설을 맡은 뒤 동료 교수님을 비롯하여 많은 분들이 맞춤법에 대한 평소 생각들을 들려 주셨다. 그 중에 공통적인 것이 '맞춤법이 까다롭고 어렵다. 너무 자주 바뀐다'는 말씀이었다.

우리 맞춤법이 좀 까다롭고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어 등 다른 언어도 우리 것보다 꼭 쉬운 편은 아니다. 문제는 외국어 철자법을 배울 때는 애초에 모르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자세로, 주의력을 집중하여 열심으로 익혀 왔기 때문에 더 잘 알게 된 듯하다. 구두점 치는 법까지 철저하게 지키려는 수준에 보통 이르러있다.

한글 맞춤법도 문장부호에 대한 것까지 다 규정되어 있으나, 어쩐 일인지 관심 있게 익히려는 풍조가 약하다. 대부분 신문에 보도된 단편적 내용에 의존할 뿐, '한글 맞춤법 해설' 책자 같은 것을 구해 보는 분은 적은 성싶다. 사실 우리 국어가 언어적으로 쉬운 맞춤법을 허락해 주지 못하는 편이기 때문에, 더욱 맞춤법을 알아야겠다는 정성이 요망되는 것이다.

한편, 1933년 처음 맞춤법이 제안된 뒤, 40년에 사이시옷이 대폭 추가되었다가 46년에 다시 줄어들었던 과정 이외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70년대와 80년대에, 맞춤법을 50년 가량이나 크게 바꾸지 않고 써왔기 때문에 현실화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여망에 따라 개정작업이 있다는 여망에 따라 개정작업이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정작 개정안이 정식으로 공포 시행된 것은 89년 3월부터일 뿐이다. 여러 번 바뀌었다는 인상을 준 것은 작업과정에서 그때그때 보도되었던 잠정안들이 기억에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유효한 한글 맞춤법은 33년의종전안에 비해보면 가급적 소폭으로만 바꾼 것이다. 다만 종전안에 언급되지 못했던 부분을 새로 확충했기에 많이 바뀌었다는 오해를 낳았을 것이기는 하지만.

해외에서의 한국어 교육은 아무리 그 목표나 시설이 좋고 비용이 풍부해도 교과목 및 학급편성, 교사의 자질 및 학부형의 태도 등이 성패를 좌우하게 된다. 그 중에 무엇보다도 교재 및 보조자료의 내용에 따라 교수방법이 부족한 것까지 메울 수 있는 수업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필자는 문화체육부의 요청에 의해 1991년부터 영어권을 위한 한국어 교재 3권을 개발하여 이듬해 말 출간하였고, 1993년 여름부터는 그 개정판이 한림출판사에서 전세계에 보급되고 있다. 그 후속 사업으로 중국 본토를 위한 중국어판이 간체자로 1993년 가을 출간되었고, 현재 일본어판도 원고가 완성되었다. 앞으로 러시아어, 스페인어판 등 몇 개 주요 언어판이 더 발간될 예정이다. 이미 많은 주교재들이 나와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새 교재를 쓰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방침을 성취해 보려는 의욕이 있었다. 1)우선 쉬워야 할 것. 초보부터 너무 어려운 내용이 적지 않았다. 2)교육적이면서 재미가 있을 것. 유독 한국어 교재는 타 외국어 교재보다 재미없거나, 좀 흥미 위주인 것은 비교육적 내용이 섞여 있었다. 3)한국어의 정확한 음운, 문법 등의 정보가 반영되도록 할 것. 비전문가가 쓴 교재들 중에 잘못된 부분이 상당히 많았다. 4)한국의 문화에 대해 드러나지 않되 자연스럽게 소개가 되도록 할 것. 국가 지원 교재라도 선전의 냄새가 나지 않도록 했다. 5)학생 혼자서도 어느 정도 자습이 가능하도록 할 것. 벽지에서 교사없이 공부하려는 상황에도 도움을 주려는 것이다. 1권은 비디오가 준비되었고, CD개발도 전권에 걸쳐 꽤 진행되어 있다.

앞서 보아 온 主敎材 분야는 개선의 여지가 남아 있지만, 현재 꽤 많은 量의 책자가 나와 있어 미주 현지에서 지역에 따라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선택하여 쓰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현재 辭典 분야는 한영이건 영한이건 또 입문용이건 좀더 위의 등급용이건 재미 어린이용으로 나온 전문적인 것은 없는 실정이다. 다만 국내에서 국민학생용으로 영한 어휘집을 냈거나, 중학생용 영한사전이 나와 있는 정도다. 국내 二重言語學會에서는 첫 사업으로 우선 재미(또는 영어사용지역) 어린이용 입문 영한 사전을 편찬하였으나 출판사 사정으로 보류되고 있다. 그래서 필자가 현재 1995년 출간 목표로 작은 기초학습 사전(영한, 한영)을 편찬 중이다. 副敎材로 쓸 만한 한국민속전래 동화집이나 한국의 위인전기 등이 적절히 개발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국내 국민교생을 대상으로 쓰여진 것은 여러 종류가 있으나, 미국 국민학교에 다니는 한국 어린이들의 일반 수준에 비추어 너무 어려운 어휘가 많이 사용되었다거나 문화적 배경을 이해시키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필요에 따라서는 영어로 주석을 붙여야 할 곳도 있으므로, 아예 재미 어린이용 對譯版 같은 양서를 기획 출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사실 무엇보다 한글학교에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는 각종 補助敎具의 제작 보급이다. 현재 국내에도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슬라이드 정도는 나와 있지만, 교육용으로 부적절하거나 필요한 장면이 빠져 있는 등등의 문제점이 있다. 가령 홍두깨의 모습을 보여 주지 않고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는 속담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겠는가? 이훈종 편저 '國學圖鑑'(일조각, 1968) 같은 자료도 유용성이 많은 좋은 책이나, 가령 '홍두깨, 다리미' 같은 기본적인 항목이 빠져 있다. 그리고 슬라이드만 여러 차례 보여주면 싫증을 내기 쉬우므로 뒤에 말할 영화나 VTR(錄畵器)테이프와 적절히 섞어 쓰면 좋을 것이다. 한편 각종 지도와 사회, 과학 계통의 괘도 (예컨대, 정부 기구 조직도표, 인체 해부도) 등등이 구비되면 좋을 것이다. '가족 칭호' 같은 내용도 큰 괘도로 인쇄되어 있으면 교실에 비치해 놓고 학생들이 수시로 익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밖에 문법의 세부 사항도 도식화된 괘도가 있으면 가르치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끝으로 가장 전망이 좋은 한 개선안을 첨가하자면, 요즘 쉽게 설치할 수 있는 VTR의 활용방안이다. 이미 일부 한글학교에서는 한국 TV 프로그램 중 유치원생용 (뽀뽀뽀) 및 국민학생용 (EBS 프로그램)을 녹화하거나, 'TV 文學館' 같은 문학 프로그램을 녹화하여 시청각 교재로 활용한 예가 있다. 이런 기성 프로그램 중에서나 교육개발연구원과 교육 TV에서 제작해 내고 있는 교육 프로그램 중에서 재미 어린이용으로 적절할 것을 복사하여, 현재 영화필름 대여하듯이 교육부가 교육원을 통해 보급하는 체재를 갖춰 보면 좀더 효과적 활용이 가능할 것이다. 영화 필름에 대해서는, 일반 홍보용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보조 교재로는 부적절한 면을 지적하는 교사가 있었다. 가령 '추석'에 보여 줄 만한 기본적 필름 대신에 '석탑'을 전문적으로 파고든 필름만을 자꾸 배포하면, 토요학교에서는 거부 반응을 일으키기 쉽다. 아울러 한글학교의 한국 관계 도서 또는 도서실의 구비 실태를 보면 아주 미미한 단계이다. 제일 한인 침례교회 한인 학교(이한일 교장)처럼 장서 1만권을 갖춘 우수한 곳이 있는가 하면, 아예 도서실이 없는 학교가 퍽 많다. 교재를 보충할 수 있는 쉽고 좋은 책이나 자료를 도서실에 복본으로 구비하고 있어야 교사나 학생들이 그때그때 활용할 수 있음은 강조할 필요도 없는 점이다. 여기서 자매학교제도의 활용이 요청된다. 즉 국내의 국민학교나 중학교와 결연을 맺어 서로 읽고 난 책들을 교환하는 방식, 또는 한국에서 책 모아 보내기 운동을 벌이는 방식 등을 모색해 봐야겠다.

한국어는 소위 알타이어족에 속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 왔을 것이다. 또한 옛날 국사 책에는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한다는 통설도 소개되었을 것이다. 주로 유럽의 학자들에 의해서 연구되어 온 세계 언어의 판도를 볼 때, 한국어는 인접한 중국어와는 아무 유형적 체계적 유사성이 없다. 중국어는 티베토-버마 어족에 속하여, 우리에게 많은 외래어를 차용시키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계통적 유연성(有緣性 affinity)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어는 대륙 북방의 언어와의 비교로 그 계통적(geneological) 관계를 모색해 보게 되었다.

19세기에는 유럽학자들이 헝가리어와 핀란드어를 포함한 우랄어, 그리고 터키어, 몽골어, 만주-퉁구스어를 주로 한 알타이어를 함께 묶어 우랄-알타이어족이라는 가설을 세웠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핀란드 학자 람스테드(Ramstedt) 교수가 알타이어들만 따로 떼어 연구하며 한국어를 제 4의 구성원으로 설정하는 이론을 세웠다. 이 새로운 견해가 우랄-알타이어족설보다는 좀 더 발전된 것이고, 한국어를 어느 어족의 일원으로 본격적 인정을 한 것이었기 때문에, 국내 학계의 지지를 쉽게 얻었고 국어학자들에 의해 한국어의 계통은 알타이어족에 속한다는 이야기가 이미 증명된 정설처럼 퍼져 나간 것이다.

람스테드 교수는 알타이어들이 만주 서쪽 흥안령 산맥을 중심으로 모여 있다가 동서남북으로 퍼져 나갔다고 가정하였다. (원래는 몽골 서쪽 알타이 산맥 근처를 기원으로 했다는 설에서 알타이어족이라는 이름을 얻었었다.) 그 중에 터키어들을 쓰는 어파(語派)는 소아시아반도까지 이동하여 자리를 잡고 있다. 미국의 몇 학자들은 일본어도 알타이어족에 속한다고 보기도 한다. 이렇게 장황히 판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알타이어족에 속한다고 거론된 언어들이 모두 한 때 대제국을 세웠었다는 사실을 주목하려는 까닭이다.

다 알다시피 몽골은 징기스칸에 의해 유럽까지 진출했었고, 터키도 오토만 제국을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쳐 세웠었고, 만주족은 청나라라는 대제국을 이루었다. 일본어도 알타이어라고 보는 가설이 있어서인지 대제국의 흉내를 내어본 적이 있다. 알타이어족 속의 각 어파들은 공통적으로 역사의 한 자락에 영토 확장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었다. 그런데 웬 일인지 한국어만큼은 그런 역사를 겪은 적이 없다. 이 사실은 역설적으로 국어가 알타이어가 아닐 수밖에 없다는 의심을 품게 한다. 물론 이런 추측은 과학적인 공통 특질에 근거한 방법이 아니니까 그냥 공상적인 이야기로 끝내야 한다.

진정 비교언어학적 연구라면 공통 특질이 체계적으로 입증되어야 한다. 만약 한국어가 알타이어라면 다음과 같은 공통 특질을 품고 있어야 할 것이다. (1) 어간에 굴절접미사가 많이 붙는 교착어(agglutinative language)다. (2) 모음조화가 있다. (3) 관계대명사가 없다 등등이 과연 일치한다. 그리고 수사(數詞)와 같은 어휘들이 서로 체계적 대응관계를 맺고 있다는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이런 면에서는 알타이제어와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서로 좀 비슷한 어휘들까지도 원래 계통적 유연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후기의 차용에 의해 생긴 것이라고 설명하는 주장이 있다.

이 글에서는 어떤 표현이 규범에 맞는다 아니다라는 작은 문제를 다루지 않고, 한국어의 기원이나 계통이 어디에 있는가를 크게 살폈다. 이미 세계 학계에서 믿지 않는 우랄-알타이어족이란 말은 더 이상 쓰면 안 되고, 알타이어학계에서도 근래 한국어를 아직 그 일원으로 보기 어렵다는 회의론이 오히려 강해져 있다. 아마 대제국의 침략적 기질을 가져 보지 않은 한국인은 알타이어족의 우연한 공통 특질인 '대제국주의' 항목에서 동질적이 못되기 때문이리라. 오, 평화를 사랑해 온 한 민족에게만은 신의 가호를 주셔서 평화를 지키게 도와 주소서.

2년여를 영어 공용화 또는 제2 공식언어 설정 여부로 논난을 해 오고 있으나, 이 문제의 핵심은 설사 설정을 한다해도, 설정의 선언적 효과에 그치자는 것만이 아니고 실제 그 뒤에 어떻게 실행해 나가느냐에 있다. 다시 말해 선언 여부는 애초 별 의미가 없고 그런 절차 없이도 영어가 많이 쓰이는 계층과 분야(예컨대 외교, 통상, 학술, 문화교류 등)에서는 어차피 영어를 앞으로 제대로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현실이 닥쳐 와 있다. 그 동안 개인의 세계시민화 대 민족공동체의 정체성 보존, 국가 경쟁력 강화 대 문화적 제국주의 대처 등을 논위해 온 내용들은 대개 비구체적인 명분론으로 그쳤고 실용적인 핵심을 소홀히 다루어 왔다. 제발 더 이상 영어 공용화의 명분 여부를 논하지 말고, 이미 '공룡화'되어 있는 현실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생각에나 힘을 쏟자.

필자는 국어학을 전공했으니 우리의 정체성을 아끼는 열의는 누구 못지 않으나, 공용화 운운까지 와 있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미국에서 영어로 언어학을 공부했고 서울대 또는 호주 시드니대 등지에서 오래 외국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교육한 경험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구체적 대응 전략들을 제안하고자 한다.

제1안은 우선 재외 영어권지역에 있는 교포 2세들을 활용하자는 것이다. 북미주에 대략 180만, 대양주에 5만 이상의 교포가 있으니 그 2세들이 얼마동안 모국 생활도 해 볼 겸 한국에 와서 영어교육에 참여하도록 촉진하자는 것이다. 교포 자녀들은 아무래도 한국에 대한 언어, 문화 상의 지식이 있으므로 생판 외국인보다 언어교육에도 이점이 있을 수 있다. 한국에서의 생활에 적응하려는 동기나 동경심이 있는 지원자를 가려서 언어교육에 관한 기본 과정을 어느 정도 이수시켜 현장에 투입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 영어교육 분야를 이미 전공한 사람은 우선적으로 유치하고, 앞으로 이 분야를 지원할 사람은 국내에서 좋은 대우를 보장해 주는 전망을 조성하면 호응이 적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 발상은 교포 학생들을 지도해 보면서 특히 인문계 학생들은 불분명한 장래 계획으로 불안해 하고 결혼 상대자 물색도 어려운 현실에 불만이었던 상황을 깨어주려는 데서 싹 튼 것이다. 다만 이들 중 하나라도 차츰 압구정동에서만 소일하는 일이 없도록 동기와 자질이 있는 지원자를 선발하고 사후 지도를 잘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제1안에서 아주 외국인인 영어사용자들을 꼭 배제하자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고, 이미 교육부에서 그런 유치 계획은 시행하고 있다 한다. 미국의 평화봉사단원이 6-70년대에 우리의 영어교육에 도움을 준 선례도 많이 참조하여야 하며, 단기 관광객의 여비 벌이나, 예전에 미군(GI)이 언어교육이 무언지도 모른 채 투입되었던 식은 피해야겠다. 이렇게 좋은 교사들을 확보한 뒤에, 교육부에서 발표한 주당 1시간 이상 영어로만 수업하는 방안을 시행해야지 원어민이 아닌 교사가 꾸리는 데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이미 하는 곳도 있지만 지역(서울 강남 등지)에 따라 영어권에서 생활을 하다 온 재학생들을 활용하는 방안을 극대화해서 우선 대처해 봄직도 하다.

제1안의 연장으로 제2안은 영어집중 캠프의 운영이다. 교포나 한국학 지망 외국학생을 대상으로 단기 하계학교를 운영하자는 아이디어다. 서울 교외와 대덕 단지 근처 등의 학교 기숙사 시설이 방학으로 비어있을 때, 영어사용자와 한국인을 적어도 1 대 3 이하로 구성하여 24시간 영어만 쓰며 살아 보도록 하는 설정이다. 원래 목표언어를 현지에 가서 물에 빠져(immersion) 배우듯 하면 제일 좋겠으나 비용이 많이 들므로 비슷한 환경을 국내 요지마다 설정하되 원어민의 여비, 숙식비, (건강, 재해) 보험료 정도는 수익자 부담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제안이다. 여기 따르는 세부 계획은 지면 관계상 다 쓸 수 없으나 원만히 구성할 수 있을 전망이다.

제3안은 이미 일부 출판사들이 시도한 예도 있겠지만, 영어로 된 각종 노래 가사, 영화 대사를 영어교육에 대폭 이용하되 인터넷을 통해 대화식(interactive)으로 운영될 수 있게끔 흥미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자는 것이다. 종래 책이나 카세트, 비디오로 끝나던 교재를 활성화해야 새천년에도 살아 남을 것이다.

[위의 글은 ‘중앙일보’에 “영어 공용화에 대한 대응 전략”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는데, 교정 기자가 임의로 ‘룡’자를 ‘용’자로 고쳐 버린 것이다. 본래와 다른 의도로 읽혀지게 되었지만 효과적으로 정정하여 원 의도를 널리 밝힐 수도 없는 채, 여기에나마 적어 둔다.]

"미국 CIA가 편찬한 세계역사지도"가 큰 도서관 지도실에 가면 있다. 필자는 70년대 유학 중 매서추세츠 대학에서 미언어학회 여름 특강을 듣다가 평소 좋아하는 지도 훑기를 하러 들어갔었다. 책상 위에 뽑혀 나와 있던 큰 책 중의 하나에 CIA란 이름이 보이길래 흥미를 돋우며 들쳐 보다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한반도 부분을 주목하며 죽 넘겨갔는데 칠한 색깔이 계속 중국과 같았다. 거의 뒷장에 가서 1897년부터 1910년간만 다른 색깔을 칠했던 것이다. 다시 앞뒤를 점검해보니 그 이전 기간은 죽 중국의 속국이었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 반짝하다 망한 13년간만 독립국이었다는 해설이 붙어 있었다. 웬 식민사관(史觀)이냐고 항의하기 전에 필자는 한 한국학 학자로서 우리를 보는 외국의 왜곡된 시각을 통감했다.

가장 가까운 우방이라는 미국이, 그것도 국제 지리적 사항을 보통 너무 모르는 일반시민도 아닌 정보기관의 관점이 그렇다면 이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viceroyship 즉 '총독의 지배지역'이었다는 것이니 아무리 조공을 바쳐오긴 했지만 한사군이 내내 계속 되었던 것처럼 간주해 버릴 수야 있겠는가? 그 뒤 미국에선 언어학 박사논문 쓰랴, 귀국 후는 학교 일에 쫓기랴 수정 요청도 못했으니 지금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알 수 없다.

위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비교적 국수주의적 분위기가 짙은 국어학을 전공하다 보니까 국제적 감각이 없는 발언들에 휩싸여지게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근래에 와서 국제화니 세계화니 하지만 남의 생각도 모르면서 어쩌자는 것인지 한심할 때가 많다. 2000년에 개정된 로마자 표기법이 바로 그런 식으로 외국인 사용자는 경시한 채 국내의 시각 위주로 치우친 것이었고, 심지어는 북한의 로마자 표기법과도 더욱 거리가 멀어지는 조처를 강행한 꼴이 된 것이다. 또 정부의 몇 억 짜리 예산을 써가며 한국어의 국제화니 세계화를 촉진하는 사업들과 교육과정이 90년대 후반부터 각 단체, 대학교들의 유행 사업처럼 되었다. 그런데 외국에서 한국어 교육에 종사하는 교수가 전하는 바로는, "그 학위를 하고 온 어떤 사람의 말을 빌리면, 그 program을 국제경험이 제일 빈약하고 또 태도도 국수주의적이기 쉬운 국문과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한다고 하고, 그것이 큰 문제라고 하더군요."라는 말이었다.

그렇다. 국어학자는 약간 국수주의적이며 고루한 듯하고, 무릇 규범에 따라 말을 곱게 하고 글을 바르게 쓰는 법이나 연구하고 교육하는 사람 정도로 대해 주는 사회적 통념이 있다. 물론 학교교육 등에는 그런 규범적 기능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언어의 본연적 생리를 알게 되면 이와 같은 통념은 아주 일부면만 대상으로 해서 잘못 형성한 것임을 알게 된다. 진정한 국어학자나 언어학자는 그렇게 좁은 시각을 가진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언어는 언어학자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스스로 자체적으로 변화하며 자율성을 가진 생명체라는 것을 알아야 된다. 국어학의 대가가 '우리말본' 같은 문법책에서 "벽보가 잘 보힌다/걸힌다"라고 써야 피동태가 된다고 규정했다고 "보인다/걸린다"가 "보힌다/걸힌다"로 바뀌지는 않는다. 그러나 요즘 유행하는 일반 문투 중에 "낙관적으로 보여진다"라는 피동표현은 많은 사용자들에 의해 자율적으로 현대국어에 슬며시 등장한 것으로 보여진다.

언어는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규약을 정해 공감하며 써야지 국어학자라도 결코 인위적으로 좌우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언어 활동 속에는 말소리를 글로 적는 맞춤법 또는 철자법이 있다. 국어도 어느 만큼 그렇지만 영어의 경우은 발음과 철자가 너무 달라 몇 차례 철자 개혁 운동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이 경우 일반인들이 관용해 오던 보수적 철자법에 너무 묶여 있어서 모든 시도가 다 수포로 돌아갔던 것이다. knight가 옛날에는 그야말로 '크니흐트'로 실제 발음되던 때가 있었으나 이제는 '나이트'로 바뀌어 철자만 보고는 발음을 바로 낼 수 가 없지만 그대로 쓸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된 것이다. 반면 북한 철자법의 원칙을 보면 발음관습에 역행하면서까지 원래 형태를 보이기 위해 '로동' 같은 새 표기법을 강행한 것이다. 소위 버들 '류'(柳)씨들도 마찬가지다. 개혁이 지나쳐 교왕과직(矯枉過直: 잘못을 바로 잡으려다 더 나쁘게 됨)을 범한 셈이다. 결국 균형있는 감각이 어디나 필요한 것이 아닌가?

인간은 날마다 언어를 쓰며 살고, 또 언어로써 많은 일을 수행하며 나아가 문화의 발전을 꾀한다. 언어는 다른 동물들과 달리 오로지 인간만이 지닌 도구로서 조직적으로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게 한다. 그러나 이렇게 인간에게 긴요하고 고유한 도구인 언어의 구조를 낱낱이 파악하기란 아주 어려워서, 일찍이 인도나 희랍 시대로부터 이미 언어가 학문적인 연구의 대상이 되어 왔다. 문화의 암흑기라는 중세에도 라틴어만은 인문 과학의 주종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의 표현 수단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이런 상황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문예 부흥 운동도, 역설적으로 나라마다의 언어 및 방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됨에 따라 그 기운이 조성된 것이다. 이처럼 언어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의 역사가 일반 언어학 및 개별 언어학을 낳게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서양에서 한창 르네상스가 일어나던 십오 세기를 즈음하여, 세종 임금을 중심으로 한 젊은 학자들이 이룬 언어의 연구는 세계적으로도 높은 수준을 보였다. 그 뒤로 언어 연구는 중국어, 일본어, 몽고어, 만주어에까지 이르렀고 개화기 뒤로는 국어학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점차로 언어학, 또는 각개 어학을 왕성하게 연구해 온 전통이 있으며 그 분위기가 오늘날에도 이어져 온다. 오늘날 이른바 중진국 가운데 유럽 및 미국의 유수한 대학에서 한국만큼 언어학 박사를 많이 배출시킨 나라도 없다. 덴마크가 그 한 보기가 되듯이 아마도 주변 강대 국가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나라일수록 어학에 대한 관심이 큰 듯하다.

대학마다 인문 대학이나 문과 대학에 대부분 어문 계열의 학과들이 있다. 어문 계열 학과의 삼사 학년이 되면 어학과 문학 중에서 더 관심 있는 쪽을 선택하여 전공할 수 있다.

어학은 문학보다 좀 더 실용적인 면이 짙어 보이기는 하나 결코 실생활에 필요한 전문적인 기술로서의 지식만 탐구하는 것은 아니다. 어학을 공부하는 궁극의 목표는 제 나라의 문화와 나아가서 세계 보편성에 공헌할 수 있도록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학문적인 교양과 창조 능력을 쌓고, 올바른 인격을 형성하려는 것이다. 일반 교양 과목 속에도 국어, 작문, 영어, 독어, 불어, 중국어, 언어학 개론 같은 어학 계열의 과목들이 들어 있는 것이 이 때문이다.

대학마다의 사정에 따라 학과의 설정이 다르지만, 국어국문학과, 중어중문학과, 영어영문학과, 불어불문학과, 독어독문학과들이 가장 많고, 요즈음에 들어서는 일어일문학과, 노어노문학과, 스페인어스페인학과들도 여러 대학에 설치되어 있다. 일반언어학을 다루는 언어학과는 아직까지 서울대학교에만 개설되어 있고, 힌디어, 아랍어, 포르투갈어, 말레이-인도네시아어, 이태리어, 스웨덴어, 네덜란드어, 이란어, 태국어, 터키어와 같은 특수한 언어를 다루는 대학으로 한국외국어대학교 같은 곳이 있다.

일이 학년 동안 교양 과목과 전공 필수 과목들을 배우고 나면 삼사 학년에서는 주로 어학 관계의 전공 선택 과목을 공부하게 된다. 앞서 열거한 학과들의 교과 과정을 크게 두 유형으로 소개하면 국어학 또는 언어학이 그 첫째 유형이요, 외국어학이 그 둘째 유형이 된다.

첫째 유형은 특정한 언어에 대한 훈련의 단계를 꼭 거치지 않고도 깊이 있는 대학 교육을 시작할 수 있는 학과요, 둘째 유형은 해당하는 외국어에 대한 훈련을 받으면서 더 깊이 이론적으로 탐구하는 학과이다. 첫째에 드는 국어학과에는 개론, 강독 및 국어사, 국어 방언학, 국어 정서법과 같은 강의 말고도 언어학과와 마찬가지로 음운론, 문법론, 어학사 들이 개설되어 있다. 대학원 과정에 가면 음성학, 형태론, 의미론들이 추가되며, 둘째 유형의 학과들보다는 대체로 어학 관계 교과 과정이 다양하다.

둘째 유형의 외국어 학과들은 영어학과를 보기로 들어보자면 중급 영어, 고급 영어, 영어 회화, 영어 문법, 영어 작문, 영어 영습, 시청각 영어, 시사 영어와 같이 외국어 교욱을 보강하는 과목이 꽤 많이 차지한다. 이것은 언어 훈련이 더 깊이 있는 학문의 다음 단계를 위한 준비 과정으로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비록 수효는 적지만 영어학 개론, 영어학 특강, 영어 음성학, 영어 문법론, 영어사 개론 같은 개별 언어학적인 강의들도 개설된다.

한편 언어학과도 만주어, 범어, 희랍어, 라틴어와 같은 특수 언어에 대한 강의를 열고 있어, 언어 훈련을 겸하는 둘째 유형에도 든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언어학과에서는 일반적인 언어의 본질과 기능 그리고 그 변화와 같은 언어 현상 전반에 걸친 일반 언어학을 대상으로 하므로 특정한 언어의 훈련을 꼭 전제로 하지는 않고, 다만 연구의 폭을 넓혀 주기 위해 관계되는 언어를 다양하게 학습시킨다.

그러면 어떤 자질을 가진 사람이 이 학과의 연구 생활에 적합한지를 살펴보자. 이때에도 국어국문학과와 외국어문학과로 크게 나누어서 얘기할 수 있겠다. 본디 인문 과학은 물질의 충족이나 눈앞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학문은 아니요, 인간의 정신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정신 과학이다. 이러한 전제를 받아들일 수 있고 특히 우리 민족 문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데에 각별한 관심을 가진 학생이라면 국어학을 해도 좋을 듯하다. 마찬가지로 같은 전제를 받아들이면서 외국의 문화 배경에 특별한 관심을 느끼는 학생들은 외국어학을 하면 되겠다. 그러나 특별한 관심보다는 영어 성적이 괜찮아서, 또는 취직이 잘 되니까 영어를 전공으로 선택한 사람은 졸업한 뒤에 흔히 회사원이나 은행원이 되기 쉬워 본디 인문 대학 계열에 영어영문학과가 존재하는 이유가 유능한 영어 학자를 배출하는 것임에 비추어 볼 때 그리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그런가 하면 국어학과가 이미 알고 있는 모국어를 다루는 학과라고 쉽게 생각하여 선택하기가 쉬운데, 학문은 높은 수준에 이르면 다 똑같이 어렵기 때문에 그러한 안이한 태도로는 대성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국어학은 세계적으로 한국의 학자들이 그 분야의 최고 권위가 될 수 있는 만큼 우수한 두뇌들이 거기에서 보람을 찾을 만한 학문이라고 본다. 또 요즘 언어학의 경향은 자기가 잘 알고 있는 모국어의 연구에 우선 주력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외국어 학자들도 국어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어문계 학과의 졸업생은 어떤 분야에 주로 취업하게 될까? 인문 대학 출신의 가장 바람직한 진로는 대학 및 연구 기관에 남아 계속 연찬을 쌓아 가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지만 외교관, 일반직 공무원, 언론 기관, 금융 기관, 기업체 같은 곳으로도 많이 진출하고 있다. 그리고 교직 과목을 이수해서 교원 자격을 딴 졸업생들은 중-고등학교에서 많이 교편을 잡고 있다.

과에 따라 특징을 살펴보면 대학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나 대학에서 교양 과목으로 가르치는 국어, 영어의 시간 수효가 많아 국문학과와 영문학과 출신이 대학의 교수로 남을 기회가 많다. 또 국문학과와 영문학과와 중문학과 출신은 대개 기업으로 많이 진출하며, 독문학과, 불문학과, 중문학과와 언어학과 출신이 언론 기관에 진출한 비율도 높다. 중-고등학교 교원으로는 국문학과와 영문학과를 비롯하여 독문학과와 언어학과 출신들이 많이 진출하고 있다.
대학이건 중-고등학교건 교직에 남으려는 사람은 돈이나 권세에서 인생의 가치를 찾지 않고, 인간과 사회에 대해 끊임없는 흥미를 가져 학생의 인간적인 성장과 인간 사회의 발전적인 계승에 뜻을 두어야 한다. 이런 적성을 보이는 사람으로서 언어 현상에도 관심이 깊다면 어학 계통의 전공을 택해도 크게 실망하는 일이 없을 듯하다. 고등학교에서 문법 분야에 좋은 성적을 보인 학생은 특히 선택해 볼 만한 학문이다.

어학은 경제 발전과 기술 우선의 시대에도 늘 밑받침이 될 분야이므로 일시적인 각광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꾸준히 발전할 것이 틀림없는 기초 학문이다. 우리는 어쨌거나 호모 로퀀스(Homo Loquens) 곧 ‘말하는 동물로서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노암 촘스키(Noam Chomsky)라면 아는 사람은 어느 정도 상식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된 지가 이미 오래인 것 같다. 대체로 그의 공식적인 직업은 언어학자로 알려져 있으나, 한편 과격파 인사로서 월남전 반대 운동 등에 앞장섰던 풍모도 간과해서는 그를 다 이해했다고 할 수 없겠다. 한창 반전(反戰) 데모가 극에 달했을 때 그는 작가 노만 메일러와 함게 같은 감방 친구가 됐고, <지식인의 책임>(The Responsibility of Intellectuals)이란 에세이도 쓴, 급진적 사상의 주창자요 실천가다. 월남이 공산 세력 수중에 들어간 직후, 하버드 대학의 아시아 학생회에서 주최한 한 저녁 모임에 그가 연사로 나와 득의에 가득 찬 일가견을 펴던 일을 직접 참관한 필자는 MIT에서 그의 언어학 강의를 듣던 때와는 전혀 다른 면모를 접했었다. 몇 년 몇 월의 조약이나 성명(聲明)을 인용해 가면서 자기의 소견을 피력하는 그의 진지한 관심과 열성은 정치학 교수와 조금도 진배없는 것이었다. 사실 그는 대학의 정치학 강의도 여기(餘技)로 맡는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의 주된 관심이나 영향력이 끼친 분야는 언어학을 빼놓고는 역시 철학, 심리학, 생리학, 교육학, 영어 영문학 등등의 광범위한 비정치적 영역일 것이다. 소위 촘스키의 혁명이 언어학에서 시작된 시점은 1957년 그의 <통사구조>(Syntactic Structure)란 첫 번째 책이 등장하면서부터다. 구조주의(Structuralism)가 반세기 가량이나 풍미하던 미국 언어학계에 소위 변형 생성 문법(變形 生成 文法)의 이론을 처음 수립해 내놓은 것이다. 철학자 굿 맨(N. Goodman) 및 언어학자 해리스(Z. S. Harris) 교수의 제자로 필라델피아 대학에서 박사 학위 과정을 밟으면서 하버드 대학의 연구원으로도 있었고, MIT에 간 뒤 모리스 할레( Morris Halle) 교수와 함께 가장 명성이 있는 언어학과를 육성 발전시켜 나오는 데에도 그의 학문적 비중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그의 혁명적 언어관이 이같이 성공적으로 학계에 발붙이게 된 사례(事例)는 쿤(T.S. Kuhn)의 <과학적 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Revolutions)란 책의 주장에 잘 들어맞는 경우로 흔히 지적된다. 즉 과학상의 진보는 인내와 각고에 의해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던 종래의 관점을 반성하고, 과학상의 변화도 낡은 방식과 새로운 방식간의 갈등을 통해 ‘혁명적’ 과정을 겪어 한 방식이 지배적인 존재로 자리를 굳힌다고 보게 된 것이다. 물론 이 같은 학문상의 혁신은, 패배자는 생존키 어려운 정치 혁명과는 다르다. 만약 구체제나 방식이 새로운 기술이나 데이터의 축적을 처리해 내지 못할 때, 그 학술 분야는 위기의 시기를 겪으며 비정상적 부조리를 해결해 내는 길을 모색케 되고, 대체로 젊은 과학자 또는 신참 국외자(局外者)가 이 일을 이끌게 됨이 상례인 것이다.

러시아에서 망명 온 중세 히브리어 학자인 아버지의 권유로 언어학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그는 1953년경부터 해답보다는 문제를 더 제기하고 마는 종래의 방식을 제쳐 놓고, 한 언어의 모든 가능한 문장을 다 생성해 낼 수 있는 일련의 규칙의 체제를 가정하고 나섰다. 그는 틀에 박힌 언어학 강의를 받기 이전에 아버지와 해리스 교수 등의 원고 교정일을 하는 계기를 통해 언어를 새로운 안목으로 보는 바탕을 쌓았다고 회고한다. 이러한 비정규적 궤도로 접근해 들어온 것이 오히려 그에게 언어학상의 혁명을 가능케 한 여건이 된 셈이다. 물론 그도 50년대 초 몇 년은 구조주의의 방법을 더 개발시키기 위한 작업에도 종사했으나, 1955년 그의 900여 페이지에 걸친 박사 논문 <언어이론의 논리적 구조>(The Logical Structure of Linguistic Theory), 특히 ‘변형 분석’ (Transformational Analysis)이란 부분에서 이미 새 이론의 싹을 보였다. 이 논문은 그가 1958-59년간 프린스톤 대학에 있을 때 개고(改稿)를 시작했으나, 언어학상의 수리적(數理的) 모형에 새로운 관심이 쏠려, 출판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수학적 작업은 후일 그가 가령 사회 과학에서 컴퓨터를 남용한 데 대한 비판을 펼 때, 그의 직접 체험이 있었다는 이유로 더 신빙성 있는 주장이 되게 하였다.

한편 할레 교수의 권유로 언어학사에 대한 관심도 가져서 1966년 <Cartesian Linguistics>란 책을 내놓았다. 데카르트나 훔볼트 같은 이성론(理性論者)의 언어관을 자기의 원류(原流)로 삼고, 경험론자들을 반박하기 위한 철학적·심리학적·사회 과학적 성찰을 술회하고 있다. 구조주의 언어학, 행동주의 심리학 등이 경험론에 바탕을 두고 인간 언어도 경험·훈련·습관·과거 체험에서의 유추(類推) 등에 의해서만 창조적 국면을 발전시켜 나간다고 보는 데 대해, 촘스키는 만약 언어가 습관의 체계라면 과연 반복적인 습관이 어떻게 새로운 개신을 가져올 수 있는가 반문한다. 그러므로 그는 언어가 감각, 경험 등과는 관계없이 마음 속 깊이 이미 타고날 때부터 내재하는 보편적 사실이라고 인식하려 한다. 구조 언어학은 언어가 특정 자극에 의해 발화(發話)되는 소리라고 보는 반면, 촘스키는 새 상황에 대한 반응과 사고의 자유로운 표현 수단으로 본다. 가령 우리가 ‘언어는 코끼리에게는 사색을 위한 양식이 되지 못한다’라는 문장을 전에 접한 일 없이 지금에야 처음 들었지만 곧 이해할 수 있다는 것, 그것도 꽤 어렸을 때부터 그런 능력을 지니게 된다는 사실은, 습관·연상·조건화 등만으로 설명이 되지 않고 분명히 우리는 과거에 직접 경험한 것 이상의 문장을 알아 들을 수 있다는 진실을 웅변한다.

촘스키는 또한 어린이들이 부모들에게서 퍽 산만하고도 단편적인 데이터를 받아들여서 무슨 문장이라도 생성해 낼 수 있는 풍부성을 지니게 되는 사실을 주목한다. 따라서 그는 언어의 문법 이론이 올바른 문장의 생성 규칙만 포함할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는 어린이가 언어를 습득하는 능력에 대한 설명도 기해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17세기의 데카르트 같은 이성론자가 본유적(本有的) 아이디어가 인간에게 주어졌다고 본 것과 일맥상통하는 관점이다. 경험에서 유발되기 이전의 지식, 경험으로 얻어지는 모든 지식을 형식화할 수 있는 본래 주어진 지식을 인간이 가졌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로크나 흄 같은 18세기의 경험론자로부터 현대의 행동주의 학습 이론가들까지는 인간의 마음을 소위 백지상태(tabula rasa)라고 보아 경험하기 이전엔 아무 지식도 존재하지 않고 경험에서만 지식이 유발되는데 그 형식에 대해 제한하는 존재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린이는 모국어를 구태여 가르치지 않아도 자연히 배워 쓰며, 그것도 아주 어렸을 때 경험도 하기 이전에 이미 형성되므로 어떤 보편적 문법이 뇌의 일부에 유전되는 것으로 봐야 타당할 것이다. 촘스키는 좀더 야심적인 구상(構想)으로서, 어린이는 어떤 인간언어든지 습득해 낼 수 있는 보편 문법(universal grammar)적 능력을 지녔다고 믿는다. 즉 각 언어는 공통된 기반을 가졌고 그 기저(基底) 구조의 유사성을 밝히는 것이 그의 관심사다. 표면상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인간 언어라면 대개 구절구조 규칙(phrase structure)과 변형(transformation) 규칙을 가진다. 후자는 표면 구조와 심층 구조를 상호 연관시키며, 표면구조는 다시 음운 규칙에 의해, 또 심층 구조는 의미 규칙에 의해 해석되어야 한다고 촘스키는 체계화한다.

가령 ‘John is easy to please’와 ‘John is eager to please’란 두 문장은 종래의 구조 문법 체제로라면 ‘주어-계사(繫辭)-형용사-부정사(不定詞)’라고 똑같이 분석될 것이다. 그러나 변형 문법의 관점에서는 두 문장이 전혀 다른 심층 구조로부터 유도되어 나온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즉 동사 please에 대하여 첫째 문장에서는 John이 직접 목적어의 기능이나 둘째 문장에서는 주어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명사구화도 둘째 문장만 허용된다: John's eagerness to please. 또 한 예로 ‘the shooting of the hunters’란 구절이 주어질 때 구조 문법에서는 그 애매성을 적절히 밝힐 수 없었지만, 변형 문법에선 hunters가 shoot란 동사에 대해 주어인 경우와 목적어인 경우로 두 가지 의미 해석이 되는 사실을 두 다른 심층 구조로 설명할 수 있다. 즉 사냥꾼이 쏜 것인가 또는 누가 사냥군을 쏜 것인가가 구별되어야 한다. 비슷한 예로 ‘나는 그 여자의 요리를 좋아한다’라는 평범한 문장도 꼬치꼬치 따져 보면, ‘나는 그녀가 요리해 놓은 그 내용 자체를 좋아한다. 나는 그녀가 요리한다는 사실을 좋아한다. 나는 그녀의 요리 방식을 좋아한다. (심지어는) 나는 그녀를 통째로 요리해 먹는 것을 좋아한다’ 등등의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이와 같은 경우를 촘스키는 구조적 애매성 (syntactical ambiguity)이라 하여 어떤 통사 이론의 우열을 테스트할 수 있는 좋은 예로 삼는다. 이들 애매성은 결코 단어 자체들에 의해 야기되는 것이 아니며, 평범한 단어들이 모였을 뿐이지만, 통사 구조적인 문제점 때문에 야기되는 것이다. 표면 구조는 ‘나는 그녀의 요리를 좋아한다’ 하나지만 여러 가지의 다른 의미를 가진 심층 구조들이 잠재해 있다는 사실을 구조 언어학에선 간과해 왔던 것이다.

촘스키의 또 한가지 공적이라 하면 인간 언어는 무한한 수의 문장을 가능케 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동물들의 의사 소통 기호는 제한된 수를 가진 것에 비해, 인간은 이제까지 한 번도 똑같이 말해 보지 않았던 말을 아무 때고 할 수 있고 또 알아 듣는다. 구조주의 언어학은 채집된 언어 자료의 집적(集積, corpus)만을 놓고 분류·귀납·정리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으나, 변형 문법은 훨씬 더 포용력 있는 연역적 이론으로서 자연 언어의 가능한 문장만을 모두 생성해 낼 수 있는 문법 규칙의 수립을 목표로 한다. 아무리 미 국회 도서관의 모든 장서에 쓰인 문장을 다 집적해 놓는다 해도 인간 언어의 무한히 가능한 문장 수에 비하면 정말 적고도 적은 양인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학자가 실제로 다루는 대상은 몇 개의 임의적 예문, 즉 언어수행(linguistic performance)에 그쳐서는 안 되며 결국 화자(話者)의 언어에 대한 내재적 지식, 즉 언어 능력(linguistic competence)을 목표로 해야 한다.

다음은 문장 구성을 설명할 수 있는 문법 규칙을 수립하는 데 있어, 과연 어느 이론이 더 우수한가를 평가하는 절차를 촘스키는 제안했다. 종래 구조주의 방법은 단지 문법 규칙의 발견을 전제하며 그 이론 자체가 옳은 문법을 산출해 냈는가 아닌가를 가늠할 여지도 없는 독선적인 것이었다.

촘스키는 그의 이론을 세상에 내놓은 초기에 Robert Lees, Paul Postal 같은 동조자를 얻었고 McCawly, Lakoff, Ross, Perlmutter 같은 제자들이 이어 나왔다. 그러나 흔히 그렇듯이 새 이론의 제창자가 그의 정력을 본래 이론의 방어와 수정에 바치며, <Current Issues in Linguistic Theory>(1964), <Aspects of the Theory of Syntax>(1965), <Topics in the Theory of Generative Grammar>(1966) 등의 책을 출간하면서, 반론에 대해 일종의 회답을 꾀하는 동안 그의 제자들은 60대 후반부터 촘스키 이후(Post- Chomsky) 시대를 열기 시작하여 소위 생성 의미론(Generative Semantics)의 윤곽을 잡아 갔다. 이에 촘스키도 Jackendoff 같은 더 젊은 제자를 키워서 소위 해석 의미론(Interpretative Semantics)이라는 주장으로 맞섰다. 양 이론간의 큰 차이는 의미 해석(semantic interpretation)이 문법 전체 중에서 어디에 얼마만큼 관여하는가에 있다. 촘스키가 <Aspects of the Theory of Syntax>란 책에서 의미부는(semantic component)는 심층구조에만 관여된다고 보던 표준이론(Standard Theory)을 수정하여 Deep Structure, Surface Structure, and Semantic Interpretation(1970)이란 논문에선 표면 구조로부터의 정보도 의미부에 관계된다고 확대 표준 이론(Extended Standard Theory)을 제안한 것이 곧 해석 의미론이다. 이에 비해 생성 의미론은 심층 구조를 따로 세우지 않고 어휘부(Lexicon)와 문법 규칙들이 직접 의미 표현 (Semantic representation)에 관계된다고 본다.

이 양 진영간의 논전은 명확히 판정이 난 것도 아닌 상태로 현대 언어학은 새로운 이슈를 찾아 또 방황하고 있다. 필자는 처음 생성론에 속하는 교수들 밑에서 배우면서 촘스키는 이미 세월이 다 간 사람처럼 들었었으나, 75-77년간 하버드 대학에 가 있는 동안 MIT 강의도 들었을 때 보면, 역시 그의 강의실에는 미국 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온 학생들로 성황을 이루고 있었고 그 사변적(思辨的)인 달변으로 강의실을 압도해 나가는 솜씨는 확실히 범인(凡人)은 아님을 체감(體感)케 했다. 근년에는 다작(多作)은 아니지만 할레 교수와 함께 쓴 <The Sound Pattern of English>(1968)란 음운론에 관한 중요한 저서가 있고, <Language and Mind>(1968)란 강연집도 있고, 또 꽤 두꺼운 <The Logical Structure of Linguistic Theory>(1975)란 박사논문 책에서 통사론, 언어의 구조, 언어 철학, 문법 이론 등에 관한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끝으로 그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마무리를 한다면, 결국 그는 20세기 전반에 모든 과학이 너무나 행동주의적, 기계적인 데 치우친 것에 대해 반기를 들고, 인간성을 회복하자는 큰 흐름을 타고 정신주의적(mentalistic)인 연구 방법으로 언어학 및 여타 관여 학문의 방향을 선회시킨 것이다.

행동주의 심리학자 스킨너와의 논전에서도 ‘자극-반응’만을 놓고 따지는 표면적 관찰보다 인간의 본유한 능력에 대해 질문하고자 하는 그의 의도를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그가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도 당연한 귀결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인간 현실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진 양심있는 지식인으로서 그것도 매우 혁신적인 사고 방식으로 구체제를 반성해 보려는 혁명적 사상가로서, 비록 극단적인 면도 있긴 하지만 모두 그의 인간성과 부합하는 언행일치의 면모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겠다. (월간 독서 1979. 4)

국내의 학계나 산업계가 이제는 첨단 기술을 우리의 손으로 개발해 나가야 국제사회에서 생존해 나갈 수 있다는 말들을 요즘 부쩍 많이 하고 있다. 그러한 까닭은 외국에서 이제는 우리의 기술 수준을 인정하여 쉽사리 비결을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수출 전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우리의 실력을 스스로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꼭 수출을 목표로 하지 않는 분야에서도 자력으로 해결하지 않고는 기술획득이 안 되는 영역이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말을 토대로 한 음성합성과 음성인식이다. 이 영역은 전자공학과 음성학 등이 긴밀히 협조하여 영어나 주요 언어에 대해 이미 주목할 업적들이 나왔지만, 설사 그 세부 기술들을 그대로 이식했다 해서 우리말이 그와 똑같이 구현되지는 못하는 것이다. 국어는 그나름으로의 음성체계와 규칙이 있어서 그에 맞춰 연구를 기초부터 쌓아가야 하는 것이다.

음성합성은 쉽게 말해 기계로 하여금 우리 목소리와 거의 같은 한국어를 발성하도록 하는 것이고, 음성인식은 반대로 우리 국어를 기계가 알아듣도록 장치하는 것이다. 가령 컴퓨터에 이러한 기술을 도입하면 출력을 화면에 문자로만 하지 않고 소리로도 함으로써 맹인까지 알아들을 수 있고, 언어교육에도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한편 컴퓨터가 우리 목소리를 알아 듣는다면 컴컴한 곳에서 누운 채로 입력을 시킬 수 있어 구태여 키보드를 두드리지 않아도 된다. 맹인이나 지체부자유자들에게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우선 음성입력은 그 속도가 타자보다 훨씬 빠를 것이다.

현재 국어에 의한 음성합성은 약간씩 실용화될 단계에 와있지만, 음성인식의 영역은 아직도 초보적 단계를 맴돌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국내의 전자공업계와 정보통신 및 컴퓨터 관계자들이 국어학자들과 손을 잡아 몇 십 년을 더 고생하여야 쓸만한 기계를 만들 수 있을 전망이 보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어느 덧 우리 일을 우리 힘으로만 해결해야 할 성인이 된 것이다. (1989.8.24. 조선일보 ‘一事一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