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일본의 우익과 그 뒤를 밀어주는 정부의 작태를 보면 울화를 느끼지 않을 한국 사람이 드물 것이다. 이는 마치 못 된 버릇을 가진 아이놈이 계속 말을 안 듣는 행실과 같다. 원래 일본은 인류학적으로나 문화전파로 보아 우리와 같은 조상의 아이들 뻘이라는 심증이 든다. 그런데 일부 아이놈들이 못 되다 보면 일을 저질러 놓고 떼를 쓰기 마련이다. 강제징용이나 정신대 동원을 모른 척하며 거짓말로 새로운 우익 집단을 교육시켜 내려는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그런 무리들이다. 일단 마음을 나쁘게 품고 비행을 저지르려는 아이놈을 진정으로 반성시켜 원래 나쁜 생각을 고쳐 주기는 어려운 일이다. '수정 지시'를 따랐다고 하지만 본래 의도가 그대로 깔려 있으니, 입만 반성한다며 마음을 안 고치는 아이놈처럼 유치한 행태일 뿐이다.

우리는 일찍이 한자며 이두(일본 문자는 한국 이두의 변형일 뿐이다) 그리고 도자기 등의 고급 문화를 가르쳐 주었지만, 일본은 근래 우리에게 왕따(이지메), 원조교제 따위의 나쁜 버릇을 보내 줬다. 일본의 전자게임이나 만화 등에 깊이 깔린 저질 문화가 새로운 침략을 일삼고 있으며, 과거에 침투된 왜색어(倭色語)도 끈질기게 남아 있다. 젊고 늙은 두 세대에 걸쳐 께름직한 문제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저렇게 나오고 있는데도 특히 몰지각한 젊은이들이 일어인지도 모르고 '무데뽀'(무작정)로 왜색어를 써 '망가'(만화)를 만든다.

외래어는 원래 외국어였던 것이 들어와 귀화된 말을 가리킨다. 식민시대에 들어온 많은 일어 잔재가 아직도 쓰이고 있는데 일부는 외래어에까지 도달했다고 볼 수 있지만 쓸어 버려야 할 왜색어, 즉 외국어 자체인 것이 더 많다. 아직도 양복점, 미장원, 음식점 및 건설 현장의 용어에는 일본말의 찌꺼기가 꽤 많이 쓰이고 있어 뜻있는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예들이 허다하다. 가령 옷에 관해 '가라'가 좋다 나쁘다 하는 표현은 '무늬'란 우리말이면 족할 것이고, '기지'도 '옷감, 천'으로, '소데나시'는 '소매없는 옷/민소매'로 '도꾸리샤쓰'는 '긴목샤쓰' 정도로, '곤색'은 '감색'으로 고칠 수 있다.

식당에서도 '오뎅' 대신 '꼬치(백반)', '뎀부라' 대신 '튀김'은 꽤 세력을 얻고 있는 듯 하지만, 아직 '우동' 대신 '국수'가 꼭 쓰인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그 밖에 '요지'는 '이쑤시개', '사라'는 '접시', '와리바시'는 '소독저, 나무젓가락', '시보리'는 '물수건'으로 대체되어 가지만 아직 일본식도 꽤 사용되고 있다. '마호병'은 '마법병'이 너무 직역 같다면 '보온병' 정도가 좋겠고, '히야시한' 맥주도 '차게 한' 맥주로 부를 수 있겠다. '간스메'도 '통조림', '강기리'는 '통(조림)따개'가 가능하다. 건설관계 용어도 목수나 미장공, 철공이나 연관공 등등 각 분야에 걸쳐 아직도 일본식 용어로 모든 일을 지시하고 전수하는 경우가 흔하다.

우리가 자존심도 없이 왜색어를 왜 버리지 못하는니까, 일본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기독교인은 드물고, 잡신(雜神)의 도(道)를 따르는 오만한 민족주의자들이 득세를 한다. 과거의 잘못을 깨끗이 청산하려는 독일의 대다수 국민에 비하면 정말 한심한 인간들이라는 판단이 선다. 필자가 1년간 훔볼트재단 연구교수로 가 있던 남독 뮌헨 교외에 '다카우'라는 마을이 있다. 거기는 유태인 수용소와 소각장이 있던 곳으로 그 일부가 재현되어 있고 큰 위령탑이 세워져 있어서 독일인이 반성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 그 곳에선 진심으로 참회하며 미래에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느낌을 받게끔 전시물과 설명이 제시되어 있다. 과거나 내일은 모르고 본일(本日)만 아는 일본, 근시안의 민족은 언젠가 동아시아 이웃들에게 왕따를 당할 수도 있다.

신에 대한 신앙은 검증을 한다는 것이 벌써 불신앙의 시작이 되겠지만, 보통 인간들끼리 하는 신뢰는 증거를 보이고 계속된 실적을 쌓아야 굳어지게 마련이다. 대망의 2000년이라던 지난해가 한국주가 하락사상 대망(大亡)으로 끝나고, 대개 소망(小望)의 2001년만 바라는 지경이 된 까닭은 신뢰가 쌓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북 지원사업에 1000억 이상을 쓰고서도 노벨 평화상금 10억 원만을 벌어 왔으니 경제가 어려워질 수밖에 없잖냐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이런 와중에서 우리를 진정 두렵게 하는 것은 혹시 북한이 '경제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사실이다. 무력(無力) 통일로 전략을 선회한 상황인지도 모르면서, 우리가 오로지 믿는 물질적 힘까지 야금야금 빼어가 버리면 정신무장도 허약한 요즘 강성(强性)대국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 해이가 도처에 만연한 원인 중 하나는 전 대통령들이 솔선 수범(首犯)으로 부정 축재한 검은 돈을 내놓지도 않으면서 현 대통령과 만찬이나 하는 데 있다. 이런 장면은 아무리 지역감정 해소 또는 지역민심 확보의 궁여지책이라 해도 어린애게라도 도덕 교육을 하기에 곤란한 사례다. 독일의 통일 공로자 콜 수상이 겪는 도덕성 심판을 보면 우리는 너무 해이된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위의 글에서 한자를 보인 단어들은 소위 동음이의어라 할 수 있는 것들이다. 발음은 우연히 같지만 한자 즉 뜻이 다른 짝들(待望, 所望, 武力, 强盛, 垂範과 대비)이다. 영어로 pun이라 부르는 말장난이다. 그런데 이와 비슷하게 발음은 같으나 쓰이는 뜻의 내용이 더 넓어지거나 변화한 경우가 있다. 전 대통령들이 보안 정보 분야를 맡다가 집권할 무렵 '정보'라는 용어는 우리에게 공포와 불신으로 억압하던 개념을 주로 던져 주었다. 그러나 민주화가 이루어진 비군부 출신 대통령 시대 이후 눈에 띄게 '정보'라는 단어의 뜻은 긍정적인 쪽으로 바뀌었다. 요즘 웬만한 학문치고 정보라는 용어를 그럴싸하게 섞어 쓰지 않는 분야가 없다. 이 단어만큼 화려한 변신을 하여 총애를 받고 있는 예도 드물다. 영어로 구별하면 '첩보'라는 의미의 intelligence에서 '지식'이란 의미도 있는 information으로 더 자주 쓰이게 된 것이다. 이 두 영어 단어가 다 '정보'로 번역될 수 있는데, 국어의 '정보'에 여러가지 뜻의 다의(多義 polysemy)가 포함된 것이다. 그리고 시대가 그 어의(語義)를 원래 주로 쓰이던 의미에서 다른 의미로 기울게 바꾼 것이다.

‘민주'니 ‘민주주의'니 하는 단어도 냉전시대부터 공산권에서조차 자기들의 국호에까지 넣어 써 온 것이다. 역대 한국의 정당들이 가장 선호해서 써 온 당명도 '민주당'일 것이다. 모두 자기류의 민주를 한다는 것이니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함의(含意 connotation)는 그야말로 다양하고 또 내부적 모순까지 포함한 것일 터이다. 공산통치 방식도 민주라니 정말 민주주의를 아는 사람들이 모순과 갈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의리'라 하면 전통적으로 “사람으로서, 또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바른 도리"인데 요즘은 마치 주먹 사회에서 전용어로 쓰고 있는 성싶다. 워낙 일반인들의 의리가 없어져 버려서 그렇게 된 것이라면 더 더욱 걱정이다. 이 단어에 다의로 존재하는 뜻들 중에 자주 쓰는 의미의 상호 순위가 바뀌면서 유학자의 용어가 깡패들의 용어처럼 들리게 된 말의 경우다.

‘명분'이란 말도 유가(儒家)의 정명(正名) 사상에서 내려와 "신분에 따라 반드시 지켜야 할 도의상의 본분, 또는 표면상의 이유"라는 뜻이 있는데, 역시 정치판의 모리배들이 더 많이 애용하고 있다. 원래는 공자의 <논어 자로편>에 "명칭 곧 말의 개념을 바르게 한다"는 '정명'이란 윤리학적 용어가 나오는데 "명분에 상응하여 실질을 바르게 한다. 예컨대 부자(父子)에는 그 각각 신분에 어울리는 윤리적 질서가 존재한다"는 사상을 담고 있다. 말의 개념을 살려 명분에 맞게 쓰는 일이 이 어지러운 세상을 조금이라도 맑게 하는 길일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고 죽는 날을 선택해서 본인이 마음대로 하도록 되어 있지는 않다. 간혹 자기 선택으로 죽을 때를 고르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결국 그렇게 하게끔 상황이 운명지어졌으며 인간이 선택해서 그리 되었을 것 같지 않은 초월적 힘이 있음직하다. 지나고 보면 인간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사항들은 대개 사소한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때그때는 굉장히 중요한 일로 여겨졌지만 죽고 사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랴?

그러면 사소한 인간 제반사가 다 무상하고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일 지 몰라도, 사실 그렇게 사소한 선택이라도 잘 하고 현명하게 처신하라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다. 우리가 좌우할 수 있는 선택 중 하나로서, 어휘끼리 사이에도 선택제약(selectional restriction)이 있다. 유명한 현대 언어학자 Chomsky가 시험적으로 만든 문장에 *Colorless green ideas sleep furiously.가 있다. 각 단어끼리 만날 때마다 서로 같이 놓일 수 없는 제약이 느껴진다. ‘색이 없는 녹색’부터, 잠을 자는데 어떻게 광란하며 잘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소위 공기제약(共起制約 cooccurrence restriction)이라고도 하여 서로 같이 출현할 수 없는 단어가 선택된 경우들이다. 이와 유사하게 호응(concordance)이나 일치(agreement)라고 하는 현상도 있어서, 주어와 술어간의 성(性), 수, 격, 인칭의 일치 및 주절과 종속절간의 시제 관계도 주목되어 왔다.

근래에 ‘너무’라는 말을 기본적 제약도 호응도 어기고 너무 마음대로 쓰는 예를 자주 듣는다. 표준어의 어감으로 하면 ‘너무 ...어서 [부정(否定)적 표현]’이란 패턴으로 써야 하는 말인데, 뒤따르는 부정적 표현을 하지 않고 쓰는 젊은이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너무 좋아요.’라 해서 ‘그래서 뭐가 잘 안 되었다는 말인가?’하고 기다려도 결국 ‘정말 좋다’는 뜻으로 끝나는 것이다. 역설적 반어적으로 쓴 ‘너무 멋져요.’ 정도는 받아들인다 해도, ‘긍정 표현으로 너무 흔히 쓰는 <너무>’는 정말 너무하다고 본다. 대개 ‘아주, 매우, 무척’등으로 긍정적 표현을 해야할 경우인데 요즘 이 말들은 문어(文語)에서나 쓰고, 구어에서는 젊은이들이 모두 ‘되게’라고 바꿔서 쓴다. 결국 ‘너무’ 좋지 않으면 ‘되게’ 좋은 것이다.

이러한 식으로 부사어 뒤에 부정적 서술어가 오는 예들은 꽤 많다. ‘결(단)코/그다지/꿈에도/전혀/절대(로)/좀처럼...이 아니다/...지 못하다/...지 않다/...(을 수) 없다/...서는 안되다’ 등이 있다. 뒤쪽의 부정적 서술어 대신에 ‘어렵다, 다르다, 모르다, 모자라다, 힘들다, 죽(겠)다’ 등의 부정적 표현이 나타나기도 한다. ‘비록/차라리’는 뒤따르는 ‘...(이)지만/...일지라도/...(라) 하더라도/..(라) 하여도/...일지언정/...(이)나/...(이)라도)’로 양보적 구절의 짝을 이룬 뒤에, 또 그 뒤쪽에 부정적 서술어 ‘...이 아니다/...지 못하다/...지 않다/...(을 수) 없다/...서는 안되다’를 받는다. ‘그토록/그다지 ...지만/...건만/...하니’에서 ‘그토록’은 강한 부정으로 바로 뒤 서술어에만 걸리는데, ‘그다지’는 좀 약한 부정이며 문장 전체에까지 걸리는 부사라고 한다. “가뜩이나‘는 ‘어렵다’ 등등의 부정적 표현을 바로 수식하여 ‘..ㄴ데/...는 판에’로 호응을 이룬다.

부정적 표현이 뒤에 나타나는 경우는 아니지만, ‘가령/설사 ...라 하자/...라 치자’가 있고 여기에서 ‘가령’은 확률이 좀 있는 가정문에, ‘설사’는 확률이 아주 없는 경우에 쓰인다. 그런데 ‘설사’는 ‘설사 ...인들 ...아니다/...못하다’처럼 부정적 표현과도 쓰이며, ‘설사 ...인들 ...이겠는가?’처럼 의문형 표현과도 잘 쓰인다. 선택은 언어에서도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한국 사람이라고 다 한국어를 맞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틀리는 것들 중에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너가/니가, 나가/저가: 2인칭대명사 ‘너’는 ‘너는, 너도, 너만’에서는 ‘너’지만 ‘네가’에서는 ‘네’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구어에서는 그냥 ‘니가’라는 편한 발음이 쓰여도 글(문어)에서는 안 된다.) 이와 짝으로 1인칭 ‘나/저’는 ‘나/저는, 나/저를, 나/저에게’에서는 ‘나/저’지만 ‘내/제가’에서는 ‘내/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젊은이와 사투리 사용자들이 ‘너가’와 ‘나가/저가’라고 잘못 쓰고 있다.

배워 주다: ‘가르쳐 주다’는 뜻으로 ‘배워 주다’를 쓰는 사람들이 꽤 있다. 무슨 심리에서 이런 표현을 하는지 잘은 모르겠으나, 아마 수동적으로 주입식 교육을 많이 받다 보니 “선생님, 제게 배워 주세요.”라는 식으로 말하게 된 듯하다. “제가 배우게 해 주세요.”로 말했다면 괜찮겠고, “저를/제게 가르쳐 주세요.”라고 하면 더 좋겠다.

여쭙다: 요즘 젊은 안내원이 늙은이들에게 “질문이 있으면 내게 여쭤 보세요.”라고 한다. 무례한 표정이 아니면서 이런 표현을 하니 더욱 기겁을 할 일이다. “궁금하신 것이 있으시면 내게 물어 보세요.”라고 해야 할 자리에 아무 악의 없이 이렇게 잘못 쓰고 있는 것이다. 어른께 존경의 표시로 ‘여쭙다’를 쓴 꼴인데, 그만 그 말이 자기를 높여 버리고 만 것이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질문이 계시면 내게 여쭤 보세요.”라고도 하는 경우다. 그러나 경어를 써 드려야할 어른에 대해 ‘계시다’를 써야지, ‘질문’은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계실’ 수가 없는 대상이다.

와중: 이 말은 渦中이라는 한자어로 ‘소용돌이의 가운데’나 ‘어떤 일이 복잡하고 어지럽게 얽힌 가운데’란 뜻이 있다. 요즘 부쩍 ‘도중’이란 말 대신 ‘와중’을 원래 뜻과 맞지 않게 쓰는데, “어제 서울로 오는 도중에 아이를 잃었다.”라고 하면 좋을 경우에 “어제 서울로 오는 와중에 아이를 잃었다.”고 사실과 다르게 과장한다. 혼란한 “전쟁의 와중에 아이를 잃었다.”고 한다면 잘 어울린다. [이상억 (2006), 언어와의 만남, 학연사, pp. xiv, 448에서]

암울했던 군사 정부 시대와 달리, 이제는 맘대로 말할 수 있는 표현 내지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가 우리 나라라지만, 도대체 어불성설(語不成說)인 말까지 공중파 대중매체에서 마구 쓰는 일은 정말 어불성설이다. 참고로 ‘어불성설’이란 말은 “조리가 맞지 않아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중에도 압권은 머리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는 젊은 연예인들이 TV 화면을 점령하고, 다이어트에 대해 얘기를 하면서 “남한은 살빼기, 북한은 살까기”라고 분간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한 아이가 “너는 팔이 얇아서 나시를 입어도 되겠다”라고 하니까, 다른 아이가 질세라 “그런데 다리가 두꺼워서 다이어트를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나시’는 ‘소데나시’(소매 없는 웃옷)란 일본말이 남아서 묘하게 줄여져 쓰이는 것인데, 좀 길어도 ‘소매 없는 옷’이란 말을 쓰거나, 드물게 ‘민소매’라고 하자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문제는 팔이나 다리가 ‘두껍다/얇다’로 과감히 표현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당연히 ‘굵다/가늘다’로 써야 할 문맥인데, 어쩌다 이런 어불성설의 어휘 선택을 하는 출연자가 조금도 거리낌없이 방송에 계속 나오는지 끔찍스럽다. 우리 나라의 방송 프로그램을 짜는 두뇌들의 수준이 역시 어불성설이 아니고서야 이런 식의 표현을 마구 내뱉는 애들을 잘라 버리지 않고 어떻게 여전히 밀어 주는가? 말을 들으면 교양도 알아 볼 수 있는 것이어서 이들이 쓰는 표현은 그 외에도 여러 군데 문제를 드러내고 있었다. 노래와 춤만 잘한다고 인기와 영합한 방송을 지향하다 보니 이런 편성이 된 것이다.

연예인과 같이 TV에 나온 씨름 선수도 “고기를 한 끼에 몇 사라 씩 먹어야 씨름을 할 수 있다”고 보란 듯이 <두꺼운 허리>를 자랑한다. 꼭 불고기 집에서는 ‘사라’라고 해야 알아듣는가? 역시 TV에서 ‘사라’져야 할, 언제 무엇을 터뜨릴지 모를 ‘폭탄’ 같은 출연자다. < > 속에서 허리를 일부러 ‘두껍다/얇다’로 표현해 보았지만, 허리의 피부 두께가 아니라 허리 자체의 굵기라면 당연히 ‘굵다/가늘다’로 써야 한다. 팔, 다리의 굵기도 마찬가지다.

위와 같은 잘못은 ‘물이 얇다/두껍다’라는 표현까지 나타나게 한다. 물론 ‘물이 얕다/깊다’를 잘못 말한 것인데, 어쩌다 이런 기본적 표현까지 못하는 세대들이 자라나고 있는 것인지 염려스럽다. 나이든 세대들이 잘 가르치지 못한 책임도 있는 것이겠는데, 각 집안에서 기본적 말공부를 시킬 대화의 기회가 없어지고 아이들은 컴퓨터 앞에서 저희들끼리 주고받는 변형된 말씨에 취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방송뿐 아니라 일반 대화에서도 많이 틀리는 것은 ‘육십 네 살’식으로 한자어 숫자(육십)로 읽다가 고유어 숫자(네)로 오락가락 하는 경우다. 이것은 한자어(육십)는 한자어(사)와, 고유어(예순)는 고유어(네)와 어울려야 질서 있게 들리는 원리를 모르는 데서 저지르는 잘못이다. 덧붙여서 뒤에 오는 단위어 ‘살’이 고유어이면 ‘예순 네 살’로 해야지, ‘육십 사 살’은 이상하다는 것이다. 단위어가 ‘세’라는 한자어면 ‘육십 사 세’가 자연스럽다. 반대로 ‘예순 네 세’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방언에 따라 이 원리가 자주 깨지는 지역이 있어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단위를 나타내는 형식명사가 ‘마리’ 같은 경우는 고유어임에도 ‘육십 사 마리’가 성립되는 것 같다. 물론 이 경우에도 ‘예순 네 마리’가 더 자연스럽다. 그러나 결코 ‘육십 네 마리’는 표준어로서의 바른 표현이 아니다. 사람 수를 나타내는 ‘명’도 두 계통의 숫자와 다 쓰일 수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분, 사람’은 고유어 숫자와만 같이 쓰이고 ‘분’은 ‘사람’의 존칭 단위어다. 이같이 말들 사이에는 궁합이 맞아야 선택이 되는 관계가 내재한다.

며칠 전 핀란드의 비교언어학자가 서울대학교에 와서 알타이어와 한국어의 관계에 대한 강연을 했다. 이야기를 끝내자 언어학을 하는 젊은 교수가 사회를 보는데, “질문이 계시면 영어로 직접 하시거나 한글로 말하세요.”라는 것이었다. 본인이 잘못을 느꼈는지 곧 “한국어로 말하세요.”라고 고치긴 했지만 여전히 ‘질문은 계셨다’. ‘있다’의 존대말이 ‘계시다’라고 보통 알고 있는데다가, 청중을 어떻게든 높여야 될 문맥에서니까 그냥 “질문이 계시면”이라고 하고 말았던 것이다. ‘계시다’를 안 쓰면 뭔가 결례를 한 것 같이 느끼는 까닭에 결코 근본적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있다’의 존대말이 ‘계시다’가 되는 경우는, 우선 ‘있다’가 존대를 받을 만한 사람을 주어로 가질 때만 그런 것이다. “할아버님께서 댁에 계신다.” 그리고 더 정확히 말하면 ‘있다’가 ‘존재’의 의미(자동사)로 쓰일 때 그 존대말이 ‘계시다’다. 한편 ‘있다’가 ‘소유’의 의미(형용사)로 쓰일 때는 그 존대말이 ‘있으시다’다. 그 주어는 존대를 받을 사람 자신이 아니라 그의 소유물이다. “할아버지(께서)는 지팡이가 있으시다.” 만약 “*아버님께서 댁에 있으신다.”나 “*아버지께서 돈이 계신다.”라 하면 아주 이상할 것이다. 질문도 결코 계실 수가 없고 있으셔야만 하는 것이다.

다 짐작했겠듯이 “한글로 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글은 글이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써 놓은 글에서 소리가 날리 없다. 그러면 왜 이런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가? 그것도 언어 연구의 전문가 입에서. 이런 뒤 사정에는 ‘한글학회’ 같은 곳의 역할이 크다 아니 할 수 없다. ‘한글’은 어디까지나 문자에 대한 지칭인데, 언어 자체를 지칭하는 의미까지 확대해서 한글학회에서 써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글을 연구한다’고 하면서 문자만 연구한 것은 아니고 국어 연구를 해 왔다. 이런 오용법이 자꾸 거듭되다 보니 일반인은 물론 전공자들까지도 실수를 하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한글’을 ‘언어’의 의미로 해설해 놓은 사전까지 나와 있다고 한다. 우리는 한글이란 문자로 쓰고 읽고, (한)국어란 언어로 말하고 듣는 세상에 살고 싶다.

한 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은 ‘에’와 ‘애’의 발음이 혼동되어, 한 가지로 나고 있는 사실이다. 요즘 크게 유행하고 있는 전통사극에서 나이가 60 가량인 강원도 출신 탤런트조차 ‘세자’(世子)를 ‘새자’라고 발음한다. 그러니 더 젊고 중부지방 출신도 아닌 탤런트들은 이를 혼동하여 발음하는 일이 다반사(茶飯事)다. ‘개’를 먹었는지, ‘게’를 먹었는지 구별이 안 되니 심각한 실수를 할 경우도 비일비재할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볼펜 같은 것을 아래 윗니 사이에 끼고 그대로 발음하면 ‘에’, 볼펜 2개 높이로 이 사이를 벌려 발음하면 ‘애’가 된다. 이 차이는 ‘오’와 ‘어’ 사이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여기서 더 벌리면 ‘아’가 되고, 아예 반대로 입을 벌리지 않고 발음하면 ‘이’나 ‘우’가 되는 것이다. ‘이’에서 입술을 동그랗게 만들면 ‘우’인데 덜 동그랗게 하며 그 중간쯤에서 발음하면 ‘으’가 되는 것이다.

현재 서울말에서조차 ‘애, 에’는 구별이 잘 안 되고, ‘위, 외’는 이중모음이 되어 버려 ‘이, 으, 우, 오, 어, 아’만 뚜렷이 나므로 결국 7모음 체계로 변해 가는 셈이다. 이미 영주, 안동 등 북부 경북 방언 같은 데서는 이런 7모음 체계를 써 왔고, 다른 경상도 지역은 더 나아가 6모음 체계까지 단순화하여 ‘으’와 ‘어’가 통합 혼동되어 ‘음식, 음악'이 ‘엄식, 어막’처럼 발음 되고 있는 실정이다.

가. 모국어 보존과 민족성 유지의 병행성
주시경 선생이 "언어와 민족과 국가는 겉으로는 셋이나 속으로는 하나다"라는 말을 남겼듯이, 민족의 특성을 상실한 지구 가족들이 겪는 고난을 우리는 현재도 잘 보고 있다. 지구상의 대소 분쟁이 일어나는 근저에는 민족의 특성을 유지하려는 욕구와 언어의 바탕이 다름으로 인한 경우가 많다. 결국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이념의 대립이 와해되어 가는 현 세대에게 남을 끈질긴 바탕은, 민족성과 모국어의 유지보존이라는 토대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민족의 특성, 그 '얼'을 유지시키는 방법으로는 모국어의 보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없다.

만주족이 청나라의 멸망과 함께 거의 소멸돼 버리다시피한 사실은 멀리 두고서라도, 현재 캐나다의 영·불 지역 분리운동이나, 소연방이 각 민족 자치공화국별로 독립을 선포하며 분열의 길로 치닫고 있는 상황도 결국 언어를 달리하는 민족분파간의 갈등인 것이다. 미국은 소위 '용광로'정책으로 언어의 단일화를 기해 왔으나, 그 정책이 장점만 갖는 것이 아니라, 적지 않은 단점도 내포한 것임을 깨닫고 있다.

가령 1987년부터 89년까지 3년간 서울대에서 본인의 주관으로 UCLA학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 내에서 한국어와 문화의 현장교육'을 실시하게 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철학'이 깔려있다.

"미국의 외국어에 대한 정책은, 최근의 대통령 산하 위원회의 보고에 따르면, 귀중한 외국어 잠재 보유 능력을 '수치스러운'(scandalous) 수준까지 상실시켜 버리게 하였다. 따라서 UCLA학생 중에 스페인 계통 학생들에게 이미 실시하고 있는 계획에 이어, 한국 교포 학생들 중심의 2차 사업으로, 또 평화봉사단을 통해 한국어를 배웠던 미국인 등까지 모든 잠재적 한국어 능력 보유자에 대한 보존 교육을 실시하려 한다. 이 교육은 피동적으로 잠자고 있던 언어 능력을 재가동시켜 주는 기회가 될 것이며, 사회·문화적 배경까지 잘 이해시키기 위해 한국 현지에서 집중적으로 실시하려 한다."

위의 계획에 따라 UCLA 동 아시아 어문화과에서 한국어를 조금 배운 학생부터 원래 꽤 높은 수준까지 하던 소위 1.5세 학생까지 매년 약 20명씩을 선발, 3년간 총 60명을 봄마다 10주간씩 교육한 바 있다.

현재 이 후속 사업은 좀 더 첨단적 과학기술의 힘을 빌어 양교간의 위성통신 교육망에 의해 실시되고 있다. 1990년 4월 개통된 SNU-UCLA Interactive communication Link는 미국 뉴욕의 Optel사 제품인 특수 모뎀을 이용, 원격 화상 전송 및 음성 전달을 동시에 하되 일반 전화 2회선만 씀으로 그 비용이 꽤 저렴하다. 이같은 상설 통신 교육(및 회의)망을 설치해 놓게 되어 연중 어느 때나 접촉할 수 있고, 또 수혜인원이나 분야에 제한이 없게 되었다.

이러한 언어 보존(conservation) 사업은 미국 자체의 국익을 위해서도 궁극적으로 좋을 것이다. 가령 제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될 무렵 미국 정부 내에 한국 문제 전문가가 직접 관여하여 한반도 문제를 다루었다면 38선과 같은 분단의 비극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고, 그에 뒤따르는 한국 전쟁으로 미국이 많은 재력과 인명을 희생시키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한민족의 단일성을 잘 알던 전문가가 있었다면, 전범국인 일본의 혹가이도와 동북 혼슈지방을 떼어 주었을지언정, 죄없는 한민족을 갈라 놓았으랴!

2차대전이 끝난 뒤만 해도 2개 언어를 말하는 것은 저급의 사회 신분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나, 지금은 미국인의 가치관도 변해서 외국어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status symbol로 여겨지게 되었다 한다.

요컨대 모국어 유지 보존은 민족성의 상실을 막고 뿌리를 지키는 일일 뿐더러, 더 나아가 그 민족의 생존을 보장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나. 국수주의적 모국어 찬양은 곤란
모국어의 보존 필요성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흔히 지나치게 국수주의적, 자기 중심적 경향으로 쏠린 발언을 하게 되는 사람들을 본다. 가령 '한글'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데 심취하다 보면, 어느새 문자와 언어의 구별을 못하고 '한글'이란 말로 한국어, 즉 언어를 대신하게 하는 용법을 서슴치 않는 사이비 학자들이 있다. 한글은 과학적 문자로서 이를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문자를 지칭하는 '한글'이란 이름을 언어 자체를 가리키는 데까지 사용해서는 혼동이 심하게 된다.

항간에 '한글학자'라는 명칭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이 뜻이 '한글이란 문자를 연구하는 학자'라면 괜찮아도 '한국어를 연구하는 학자'라면 곤란하다. 도대체 문자와 언어의 차이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학자인 척하고 행세를 하는 현실에서 '한글학자=국어학자'라는 틀린 용법까지 나왔겠으나, 이는 바로 잡아야 할 것이고 끝내 정화가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이렇게 잘못 쓰는 용법 때문에 새로 생겨나기까지 한 말에, 이 글 제목으로 주어진 '얼'이란 단어가 있다. 이 단어는 현재 '정신, 넋, 혼'이란 뜻으로 쓰여지고 있으나, 이조 때는 이런 단어가 나타나지 않는다. 아니 '어리다'(迷)라는 단어로는 나타났었고, '얼빠지다'같은 말 속에 '어리-빠지다'(迷惑), 즉 '어리석어 빠지다'의 뜻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이렇게 분석하는 근거는 양주동에 따른 것이다. 그에 의하면 '얼빠지다'를 '정신빠지다'로 근래에 잘못 분석하여 '얼=정신'으로 쓰기 시작한 첫 예는 정인보의 '조선민족 5천년의 얼'이란 글부터였을 것이라 한다.

언어의 발달과정에서는 이러한 잘못된 분석에 따른 오용의 사례는 흔히 있을 수 있다. 이 경우는 그로 말미암아 '정신'이란 뜻의 고유어를 하나 더 창조하게 된 셈이고, 현재 그 어원에 대해 거부감없이 잘 쓰이고 있는 말이니, 그냥 '얼=정신'으로 받아들여 두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만약 이런 말까지 어원을 따져 현대어에서 축출한다면, 또 일본식 한자어라고 하여 '안내'는 몰아내고 대신 '인도'만 쓰자는 식으로 주장한다면, 과연 우리말에는 무엇이 남을 것인가? 더구나 '안내'와 '인도'는 그 의미가 조금 다르게 쓰이게까지 된 단어이니 그냥 다 각각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모국어란 모든 사람이 다 잘 알고 일가견을 가진 듯이 행동하기 쉬운 것이어서 자칫하면 국수주의적 태도를 보이기 쉽고 또는 엄정주의·순수주의에 빠지기도 쉽다. 그러나 이런 지나침으로 일어나는 잘못을 우리는 가급적 피하는 양식(良識)을 가져야 겠다.

다. 이민 세대 차에 따른 적절한 학습 수준 설정

모국어를 통해 주체성(identity)을 추구하려는 이유로는 대개 다음과 같은 요인을 든다. 1) 주체성의 위기를 맞아 그 해소 방법으로 자기 모국의 국력이 강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려 한다. 2) 유태인 등과 같이 그 민족의 문화 전통을 유지하려는 강한 습관에 따른다. 3) 국제 정치·경제·군사 면에서 자기의 민족적 배경의 역사적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4) 부모의 세대와 대화를 용이하게 하여 동질성을 회복하려 한다. 5) 취업상의 실제적 필요에 의해 직업의 도구로서 모국어를 배우려 한다.

그런데 사실 ‘한국어를 왜 가르쳐야 하느냐’는 것이 현안은 아니고, 이미 그 전제를 인정한 대상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하느냐를 살펴 보자는 것이 당면한 문제일 것이다. 그러한 첫 과제로 우선 대상자들을 어떻게 분류하여 각각 그 달성 목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문제다.

미국으로 이민 올 때의 시점을 참작하여 7-15세 사이에 와서 한국어와 관습도 어느 정도 유지하며 미국의 새 생활에 적응하여 온, 1.5세대는 거의 이중언어를 형성할 수 있는 수준까지 목표로 할 수 있다. 이들은 상급반까지 진급하여 이미 알고 있는 한국어나 문화의 습득 부분을 더 확충하여 한국어를 활용하는 직업으로 진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보다 더 일찍 미국에 왔거나 어린 나이부터 미국 교육만 받고 민족 교육을 접할 기회가 없어 한국적인 것을 잊고 거의 미국화된 생활을 해 온, 2세들은 우선 초급반부터 시작하여 문자 터득을 한 뒤 그 기초와 함께 민족적 주체성도 찾아 나가는 교육이 필요하다. 아마 2세들은 끝내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적어도 주체성의 위기(identity crisis)를 극복하는 데에는 심리적으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어를 어떻게 가르치느냐는 문제는 결국 한국어의 특질이 무엇인가를 대략 말해 보아야 어떤 방안이 나올 것이다. 다만 그 전 단계로서 이민 세대 차에 따른 학습 목표와 수준을 각기 달리 적절히 잡아야겠다는 것이다.

라. 한국어의 특질과 학습 수준의 설정

초급반에서는 어떤 내용을 가르치며, 중급·상급반으로 가면서 어떤 수준까지 도입하여야 하는가에는 단일한 해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영어 교육 분야같이 학습 내용이 잘 정비되어 있는 언어의 경우를 많이 참조하면서, 국어에만 특수한 사항들은 그 나름대로 적당한 단계에서 학습이 될 수 있도록 짜 넣어야 하겠다.

그런데 영어에 복수의 개념이 있다 하여 우리 말을 가르치면서 '-들'을 너무 부각시키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그것이 바로 국어의 특질로서, 구태여 수(數)표시를 명확히 않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어떤 번역가가 한국 역사책에 "러시아 배가 쳐들어 왔다"는 구절을 놓고, 이 때 실제 몇 척의 배가 나타났던 것인지 사실을 확인하느라고 고생했다는 말을 했다. '배(들)', '함대', '함선(들)'등의 표현에 수 개념이 꼭 명시되지 않는 것이 우리 습관인데, 그것이 과학적으로 문제가 있을 경우는 생길지 몰라도 결코 우리 민족이 열등하다는 식의 평가는 내릴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말에서 수 표시를 소홀히 하는 것이 단점이라면, 영어에서 화자와 주어 등의 신분을 쉽게 짐작케 하는 존비·겸양법의 경어체가 발달되지 않은 것도 단점일 수 있다. 원래 언어 간에 우열을 따질 수는 없는 법이다. 국어에 많은 과학 용어가 있다고 에스키모어보다 우수하다고 한다면, 그들은 '눈'에 관한 많은 단어(적어도; 내리는 눈, 내려서 쌓인 눈, 굳어서 눈집짓기 좋은 눈 등)에 대한 '눈'이란 한 단어('진눈깨비'도 결국 '눈'이란 단어가 핵심이다) 밖에 없는 한국어가 미개한 언어라고 반박할 것이다.

국어에 경어법이 있으므로 해서 주어를 생략해도 원래 어떤 주어가 있었던가를 종결어미에 남아 있는 경어체로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관계를 ["X가 Y에게 Z를 주(시)었(습니)다"라고 A가 B에게 말하다]라는 예문을 통해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주격, 여격(평칭/존칭), 목적격, 동사(평칭/존칭)어간, 과거, (존칭)어미, 화자, 청자

위의 현상과 마찬가지로 역시 연결어미에서도 적잖은 정보량을 담고 있어서, 접속사가 없이도 문장 전후 관계를 알 수 있게 하고, 생략된 부분을 복원시켜 이해하는 과정을 돕게도 한다. 관계대명사가 없어도 국어는 그를 대신하는 기능을 관형어미에 담긴 일부 정보를 맡게 한다.

국어의 특질 가운데 조사의 발달도 주목할 만한 것으로서 이 표시로서 자유로운 어순이 가능하게 된다. 외국인들의 한국어 학습 과정이나 표현 습관에서 조사 생략을 많이 하는데, 이런 경향은 자유어순을 어렵게 하는 것이다. 한국인이라면 조사를 함부로 생략하지 않고 어순상 문제가 없을 때만 수의적으로 생략한다.

특질의 또 한 면으로 의성·의태어, 색채어 등의 뉘앙스 표시가 다채롭고 미묘하게 발달되어 있다. 맛, 냄새에 관한 말도 그 복잡성이 꽤 엿보인다. 여기서는 색채어만 예로 들면, '희다, 하얗다, 허옇다, 희뿌였다, 희끄무레하다, 희끄스름하다, 희끗희끗, 희끔하다, 해끔하다, 해끗해끗, 희맑다, 희멀겋다, 희멀쑥하다, 희묽다, 허여멀겋다, 희불그레하다, 희읍스름하다' 등이 있다. 과연 어떤 언어가 이만큼 다양한 뉘앙스를 나타내고 있을까 감탄할 정도다.

아마도 여기서 국어의 특질로 열거한 몇 가지 예들은 한국어 학습과정에서도 꽤 상급으로 가야 배우게 될 요목이 아닌가 싶다. 경어법이나 색채어의 뉘앙스가 그렇고, 조사에서도 '-는'과 '-가'의 차이 같은 것은 어려운 부분에 속하는 것이다. 물론 기초적인 사항은 초급부터 조금 노출시킬 수 있겠으나, 이런 내용들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것은 좀 더 한국어를 배운 뒤로 돌려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한국어의 특질로 꼽을 만한 내용은 흔히 학습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수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한국어는 그 특질을 다 배우려면 좀 오래 걸리고 어려운 언어일 것이란 평판을 얻기 쉽다. 사실 한국어를 배우기는 쉽지 않고, 미국 워싱턴의 Foreign Service Institute에서도 가장 배우기 어려운 언어로 분류하고 있다. 즉 가장 머리를 많이 써야 배울 수 있는 말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한국어를 배운다는 일은 지능개발을 위해서 가장 좋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남영신씨가 엮은 '우리말 분류 사전'을 보면 그 속에 담긴 어휘들이 국어 생활에 나타나는 모든 단어를 다 망라하고 있지는 않다. 한자어와 외래어를 뺀 명사 약 2만개를 대상으로 했기 때문이다. 이 사전에 나타난 우리 문화 현상의 특징으로서, 마치 에스키모어에 '눈'에 대한 용어가 많듯이, 단청이나 무늬에 대한 단어가 86개, 씨름·태껸 등에 관한 용어가 97개 등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무당·점장이 등에 관한 단어도 68개, 무당굿에 관한 말도 53개나 된다. 탈·탈춤에 관한 어휘는 116개나 되고, 민요·민속놀이와 춤 및 그 기구에 관한 어휘는 158개, 그밖의 춤과 춤사위에 관한 어휘가 105개여서 춤에 관한 말만 379개이다.

이 사전에 의하면, 우리말에는 음악·연극·판소리·악기에 관한 명사가 224개인데 반해, 그림·조각·무늬·물감에 관한 명사가 57개 밖에 안 되어서, 앞서 춤에 관한 어휘까지 합쳐 생각하면 우리 민족이 의외로 동적인 가무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어떠한 언행·성질·능력·예절 등의 상태에 있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 315개, 언행·태도·버릇에 관한 심리적 어휘가 274개인 것으로 보아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언행과 예절에 신경을 쓰며 살아 왔는가도 엿볼 수 있다.

농사·축산·양장·원예에 관한 말 260개를 위시하여 농업에 관한 어휘 전체는 776개인 것을 보아 역시 농업국가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동물성 식료품·반찬이 426개인데 비해 식물성 식료품·반찬은 462개인 것으로 보아 식물성 식생활을 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동물 관계 구조와 생리에 관한 말이 284개인데 반해 식물 관계의 그것은 무려 613개이기도 하다. (다만 동물 이름이 식물 이름보다 2359대 1844로 많은 것은 워낙 알려진 동물의 종류수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적 식생활의 특징이 언어에 반영된 예는 젓의 종류가 57개, 떡의 종류가 116개, 죽·엿등이 175개, 밥의 종류가 83개인 것에도 잘 나타나 있다. 젓갈을 동물성 식품으로 볼 수 있고 나머지는 모두 식물성이므로 앞의 경향과 같음을 재확인할 수 있다.

이 사전에는 명사만 취급되어 있어서 맛에 관한 형용사가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지 못하지만, 우리말의 가장 큰 특징을 들라면 ‘맛’의 표현이 섬세하게 발달된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매콤하다, 짭짜름하다, 새큼하다, 딸다름하다, 시콤달콤하다, 텁텁하다, 씁스름하다, 간간하다' 등으로 미묘한 맛의 세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이런 어휘의 뉘앙스를 잘 살려 쓰면 표현의 묘미가 더 돋아질 것이다.

그러나 색깔에 관한 어휘는 그다지 다양하지 못한듯 싶다. 가령 무지개 색깔을 볼 때 '빨강, 노랑, 파랑'은 순 우리말이지만, '주황, 초록, 남'은 한자어요 '보라'는 몽고어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물론 색깔에 관해서도 맛의 경우와 같이 미묘한 차이를 표현할 수는 있다. '붉으스레하다, 거무튀튀하다, 노르스름하다, 희끗희끗하다, 퍼렇다, 푸르뎅뎅하다' 등은 그 다채로움을 보여 준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삼원색과 흑백색만 우리말일 뿐이다. '남빛'은 '쪽빛'이란 우리말이 어느덧 한자어에 밀려난 예이지만, 역시 색채 고유어가 많지는 않았던 듯하다.

외래어의 문제는 현대에도 큰 과제거리다. 가령 컴퓨터가 일반화되면서 그에 따라 들어온 용어가 거의 영어 그대로 쓰이고 있다. 이 문제는 독일 등에서와 같은 모든 비영어 사용국가의 경우에 마찬가지 형편이기는 하다.

앞으로 새로운 문명과 함께 밀려들어올 새 단어들을 어떻게 토착화시키느냐 하는 과제가 우리말의 나아갈 길을 특정지어 줄 것이다. 훌륭한 문자를 가진 민족이 어떻게 언어를 현명하게 다루어 가는가 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