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매일같이 쌓이는 전자우편을 당일내로 처리하고 나가다 보면 밤 늦게 자하연(紫蝦淵) 뒤를 지나게 된다. 가로등도 없이 으시시한 나무 그늘을 벗어나면 흐린 불빛에 수면이 드러난다. 20년 가까이 이 경치는 그런 대로 낭만스럽게 닿아왔다. 그러나 지난 번 동아리의 통과의례로 두 학생이 익사하는 비극적 사건이 있던 뒤부터는 아무래도 처연한 기분을 누르지 못하며 지나다닌다. 객기 끝에 자해연(自害宴)이 빚은, 이런 “일어나선 안될 일”이 왜 일어났는가? 그 이유의 한 가닥은 말을 않고 또는 못하고 지낸 우리 교수들에게도 있다.

본부에 불려들어가 교무처 일을 보던 80년대말 총장실 난입사건이 있었다. 흥분한 학생들의 파괴력은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아니면 실감이 안 날 것이다. 무언가 앞날이 두려웠다. 물론 그 전에도 소위 아크로폴리스(이 명칭은 ‘아고라’라고 붙었어야 할 것이 잘못된 것이다)에서 스피커 사용을 막아보려고 총장 몸소 플러그를 빼시려다 뜻대로 안된 사건도 있었다. 하물며 이 괴력에 맞서 일개 교수가 무슨 언행을 감히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식으로 유예만 해가면 큰 일이 벌어지지 않는가? 현재 우리 캠퍼스에는 각종 자해와 공해가 판을 친다. 카드놀이나 머리 염색 정도는 남에게 직접 피해를 끼치지는 않는 일종의 자해 행위겠지만 남에게 공격적인 해를 가하는 공해(公害)들은 참기 어렵다. 가뜩이나 환경오염이 심해 산기슭 캠퍼스로 들어와 있는 시간만이라도 그런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 좋겠는데, 학생들은 우리 캠퍼스가 그렇게 좋은 곳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다.

공해 중에서도 으뜸은 각종 소음이다. 스피커를 통해 점심시간과 금요일 오후에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소리들은 다른 선진국 캠퍼스에서는 겪은 일이 없다. 내 연구실은 학생회관을 마주보고 있어 호객하는 듯한 시끄러운 방송만 나오면 연구는 끝장내고 짐 싸들고 나와야 한다. 농악패의 사물놀이도 아주 외진 곳에서 하든지 수업시간이 끝나기 전에는 자제해야 한다. 수업 중에 복도나 창가에서 큰 소리로 떠드는 학생들도 기본 예의를 좀 지켜야 한다.간혹 오토바이 폭발음이 교내에서 나는 것도 문제인데 앞으로 단속을 한다니 다행이다.

기본적 예의를 지키지 않아 공해 수준에 이른 통행과 관련된 문제도 있다. 팩차기는 피해 다닐 수나 있지만 공차기는 도저히 상식 밖의 행위다. 대개 건물간의 연결 공간, 즉 많은 사람들이 통행하는 자리를 넓게 차지하고 공으로 위협하는 행위이다. 복도에서도 일시에 많은 학생들이 이동할 때 부딪히는 일은 다반사다. 가로막고 떠드는 무리도 있고 뛰어서 설치며 뚫고 가는 학생도 있다. 서로 진로를 터주며 기분 좋게 이동하도록 하자.

‘동방무례지국’이라고 어떤 외국인이 지적한 것은 우리가 달게 삼켜야 할 쓴 약이다. 그래도 근래에는 데모 끝에 최루탄 바람이 불어 들어 오지는 않아, 공기의 공해는 없어서 숨이나 크게 쉬고 안위를 삼으려 한다.

어떤 분야에 전문적 식견과 능력이 있는 사람을 프로(페셔널)라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아마추어라 한다. 그러나 이 두 부류 사이에 확연히 갈라지는 경계가 있다기 보다는 중간적 존재들도 있다고 보아야 할 듯하다. 아마추어로서도 프로의 경지에까지 이른 경우가 그것이고, 반대로 소위 프로 중에도 함량미달로 아마추어 같은 풋냄새를 풍기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는 전자(前者)인 프로급 아마추어에 대해 주목하며, 그냥 순전히 진짜 아마추어인 것과 어떻게 다른가를 생각해 보려한다.

가령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전문분야 외에 바이올린 연주에도 능하여 천재의 다재다능함을 보여 주었다. 얼마 전 출판배포업에서 전문인으로 성공한 S회장의 팔순 기념 시집출간 송축연에 가서 그의 12권째 시집을 받아들고, 또 그 속에 함께 실린 그림·조각의 사진을 보며 역시 다재다능함에 감탄했다. 시는 아마추어의 경지를 넘어 4권의 영문시집까지 출간하였으니 본격적 전업시인도 못 이룰 소산이다. 이런 결실을 보고 있으면, 그것도 70대 나이 이후에 주로 창작한 노신사의 그것이라 모든 인생경험이 녹아든 채 전해진다. 인생의 프로가 이야기하듯 자연스럽게 토로해 낸 기록, 그것은 시작(詩作) 10년 경력의 아마추어(?) 시인이라고 경시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인생은 한번 사는 것인데 잠시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있는 사람. 자기 본 직업분야에서 안정된 바탕을 이루고, 앉아 있을 때는 시, 그림, 조각, 도예 등에 심취하는가 하면, 말을 타고 승마를 즐기기도 하고, 비행기를 타고 '라라'가 있는 러시아 등지를 찾아다니기도 하는 인생. 자작시에 나오듯 "오랜 세월 편안히 즐겁게 살았노라"고 자부할 수 있는 멋진 삶이다. 물론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이나 국어로마자 표기법 연구 같은 분야는 프로들에 비하면 역시 아마추어다운 열의가 더 돋보인다. 다 완벽히 잘 할 수는 없는 것이 인간이니 당연하다.

예술 특히 미술분야에서 아마추어 예술가를 딜레탕트(dilettante)라는 이탈리아어로 부른다. 취미 위주의 예술 애호가 내지는 도락적 호사가(好事家)라는 뜻이다. 이런 애호가들은 아무리 많아도 남에게 큰 해가 될 리 없다. 그러나 전문적 식견이 온축(蘊蓄) 되어야 하는 학문세계에서는, 전체적 균형감각이 없이 일부의 개혁열기로 급조된 견해를 지나치게 광신적으로 주장하는 일은 곤란하다.

한 예를 들면, 우리 나라 삼국시대에 관한 역사책에 기록된 일월식의 측정 위치가 한반도에는 맞지 않고 중국남부지역에 맞으므로 삼국이 그 지역에 위치했었던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런 천문학적 계산은 남중국 지역을 한번 여행해 본 사람이라면 이미 기원전에 성했던 그쪽의 철기 문화가 우리에게 전달됨이 없이 중국남부에서 한반도로 민족만 이동해 왔다는 가정이 호사가의 말임을 깨달을 수 있다. 고고학과 역사학의 다른 증거들도 균형 있게 감안해서 판단해야 프로다운 태도지, 신기하다는 호기심만으로 학문적 내용을 다뤄서는 진짜 아마추어로 그칠 뿐이다.

그러나 근래에는 이런 진짜 아마추어들이 학문적 세계에까지 더 큰 목소리를 내니 문제다. 프로급 아마추어들은 프로의 수준을 어깨로 넘어다 보았기에 겸손할 줄을 알지만, 순수 아마추어들은 천방지축이다. 사실 대통령들부터도 정치는 프로 9단이라지만 경제는 아마 1단도 안 되는 터에 나랏일을 맡았었지 않았던가? 지금 이 사회에는 아마추어 같은 프로보다 프로급 아마추어들이 많이 있어야 할 때다.

우리가 한옥에서 살아야 더 우리 생리에 맞는 생활을 할 수 있다든가, 더 자연스런 모습을 찾는 것이라든가 하는 말은 생각해 보면 '신토불이'나 한 가지 말이다. 다만 흙 '토' 위에 집 '옥'이 세워져 있을 뿐이 아닌가? 그야말로 '신옥불이'라고나 할까?

우리나라의 전통가옥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삶을 배려한 주거 공간이라 한다. 따라서 집의 구조에서부터 만드는 재료에 이르기까지 자연과의 융화를 느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기단 등은 돌을 사용하고 기둥과 서까래, 문, 대청바닥 등은 나무를, 벽은 짚과 진흙을 섞은 흙벽으로 만들고 그 위에 천연 닥나무로 만든 한지로 도배를 했으며, 창에는 역시 한지를 발랐다. 바닥에는 장판지를 깐 뒤 콩기름 등을 발라 윤기있게 하였고 방수의 역할도 하도록 했다.

필자는 운이 좋게도 '남산골 한옥마을 도편수 이승업 가'로 남아 있는 한옥에서 났고 청년기까지 생활하였다. 경복궁을 중건했던 도편수가 사저로 지었던 집을 증조부께서 사셔서 조부도 거기서 태어나셨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 집은 격식을 갖춰 덧문, 미닫이, 갑창, 두껍닫이의 4겹 창문이 기둥 사이마다 둘러져 있던 기억이 생생히 난다. 특히 맨 안 쪽 두껍닫이는, 도배를 해마다 새로 하던 내 어릴 때만해도, 점점 종이 두께가 두꺼워져 불룩히 돋아나오는 것을 면도칼로 가운데 부분의 그림만 도려내던 장면이 떠오른다. 신기하게도 떠낸 서화 밑에는 다시 먼저 도배할 때 붙였던 옛 그림이 드러나는 경우도 있었다. 커서 깨달았지만 그 대련들은 꽤 명망 있는 서화가의 작품들로 그냥 도배 밑에 묻혀 버리기에는 아까운 것들이었다. 요즘 시골서도 민화들이 이렇게 도배 밑에서 발견되곤 하는 일이 종종 있다 한다.

전통가옥은 전통사회의 생산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집은 개인의 휴식을 위한 공간이자 바깥 세상과 관계되는 일을 보기 위한 보조공간이었고 여러 세대가 어우러져 지내는 생활공간이자 혼례, 상례, 제사, 잔치 등을 치루는 사회공간이었다. 과거 우리나라는 대가족 공동체 단위의 생활을 했기 때문에, 방들은 개인을 위한 공간으로 쓰였으나, 대청은 모두를 위한 열린 공간으로 마당은 마당대로 큰일을 치루는 공간으로 쓰였다.

필자는 남아였기에 사랑에 외간 손님이 계실 때도 드나들 수는 있었지만, 손님 치레가 많았던 6.25 이전 때는 워낙 어려서 어른들이 불러내 상대해 주시는 일은 드물었다. 그래도 사랑 마당까지는 기웃거리며 방과 마루에서 잔치가 벌어지는 모습이나 부산하게 상노들이 상을 들고 오르락내리락 시중들던 모습을 건져 올린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상류주택은 내외사상으로 여자들이 사용하는 '안' 공간과 남자들이 사용하는 '밖'의 공간으로 구분이 되었다. 안공간인 안채는 집안의 주인마님을 비롯한 여성들과 어린 아이들의 공간이며, 가부장적 제도의 권위를 상징하는 사랑채는 밖 공간으로 집안의 가부장과 친지를 비롯한 남자들이 글공부를 하거나 풍류를 즐기던 공간이었다.

부산으로 피난을 다녀온 뒤 할아버님께서 수원에 백칸 집으로 아주 낙향하셔서 대가족제도가 허물어지고 사랑채가 텅 비자, 마침 당시 유일한 한과 전문 '호원당' 주인 조자호 여사가 우리 사랑에서 한과를 만들어 인근 신신 백화점에 내다가 보급하는 산실이 되었다. 증조부 때 이후 이 사랑채는 조선 말기 오원 장승업, 소림 조석진, 심전 안중식, 위창 오세창, 관재 이도영, 춘곡 고희동, 무호 이한복, 청전 이상범, 묵로 이용우 등 화가들의 작업실이 되었던 것과 함께 집 자체에 무슨 생상성이 있는 것이나 아닌지 신기롭다.

사실 어머니께서 득남을 하실 때는 어찌 미리 짐작을 하셨던지 조부께서 특별히 사랑방 아랫목을 비워 주셔서 형과 본인 두 아들을 보셨고, 사랑채에 오래 기거하는 손님이 있다든가 무슨 이유로 뒤안채방에서 몸을 푸셨을 때는 두 누이를 얻으신 것이다. 각 방과 남녀간의 출산이 관계라도 있는 것처럼 된 셈이며, 그 터울도 3년씩 규칙적으로 되었던 점이 풍수지리적인 원인이나 없었는지 궁금하다.

그 외에도 전통주택은 상하 신분제도의 영향으로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공간을 다르게 배치하였다. 상(上)의 공간인 안채와 사랑채는 양반들이, 하(下) 공간인 행랑채는 대문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행랑아범, 어멈, 머슴들이 기거하는 공간이었으며, (사랑)중문간 행랑채와 (안)아래채는 중(中)의 공간으로 중간계층인 청지기와 할멈, 안잠자기가 각각 거처하는 공간이었다. 이들 공간들은 커다란 한 울타리안에 작은 담장을 세우거나 채를 분리하여 구획하였다. 이렇게 상류주택은 신분과 남녀별, 장유별로 공간을 분리하여 대가족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당시의 가족생활을 고려한 공간 배치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행랑이나 아래채에는 늘상 어려운 처지나 불구인 장애인들이 집안 일을 조금씩 도우며 같이 살았다. 피난 때는 이들이 집을 지키고 있었으나 좋은 서화 골동품들이 흩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사회적 지위와 재력을 고루 갖추었던 조선시대 상류층의 주택에는 솟을대문이 있었다. 이 집도 경제적 여유가 있었던 사람이 지었으므로 규모있게 지었으며 도목수로서 주택의 장식에도 섬세하게 신경을 많이 써서 기능적인 면에서뿐 아니라 예술적인 가치가 있는 집이 되었다. 특히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있다가 지금은 없어진 월문은 장식성을 중시하여 색벽돌로 구성된 우아한 구조를 지녔었다.

그런데 내가 자랄 때 이 대가집의 대문은 집 규모에 안 맞게 우묵한 채로 기어 들어가듯 모양새가 잡혀 있었다. 이 집이 원래 있었던 광교 옆 삼각동은 옛날에 높은 집이 없었을 때 덕수궁에서 빤히 보이는 곳이었기에 궁에서 밖을 보시던 고종황제께서 저 여염집 대문이 왜 그리 높냐고 하시는 바람에 보통 높이 보다도 한참 낮춰 그리 되었다는 설화가 집안에 전해 내려온다.

인생살이는 여러 형태의 시험이 연속되게 마련이다. 태고적에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느냐 마느냐 하는 시험을 당한 이래, 현대에는 각종 입학시험과 入社 시험 또는 고등고시 등의 형태로 우리에게 희비를 안겨 주고 인생행로를 결정 짓는다. 사실은 이런 제도화된 시험 이외에도 매일의 생활은 각종 테스트의 연속이다.

차에 받히지 않고 길을 무사히 건널 수 있는가, 남보다 먼저 택시를 잡을 능력이 있는가, 어느 상점에 가서 무슨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는가, 사업에 관한 정보를 어떻게 빨리 알아서 더 큰 이익을 올리는가, 인간관계를 어떤 요령으로 원만히 유지하여 욕 안 먹고 사는가, 출세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어느 기회에 어떻게 두각을 나타내 볼 것인가 등등, 그 사람의 일거일동은 곧 시험에 대한 즉각적인 답안이라고 할 수 있다.

1월에는 각종 시험 중에서도 백미(白眉)라 할 대학입시가 있었다.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지원자들의 긴장된 태세에 비해서는 좀 미안한 얘기지만 보통 이틀간 꼬박 매달려야 하는 채점 과정은 상당히 지루한 것이다. 그러나 간혹 뛰어난 상상력과 창의력을 지닌 지원자의 명답안을 접하고 지루함을 면하는 일이 있어 그런대로 유쾌한 작업이 될 수도 있다.

영어 시험에 ‘A woman dresses as much to please herself as to attract man.'이란 문장을 해석해 보란 문제가 있었다. 다 아시겠지만 정답은 ‘여자는 남자들을 매혹시키려는 만큼이나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옷을 입는다’ 정도가 될 것이다.

우선 상상력의 고도(高度)에 따라 온건한 것부터 소개하겠다. ‘어떤 여자는 남자들을 매혹시키는 것에 대한 재미로 옷을 입는다.’ 필요한 어휘는 대충 다 해석했지만 ‘as much~as'의 용법을 모른 경우다. ‘부인의 옷은 그녀의 기쁨만큼 남자에겐 귀찮다.’ 블론디 만화에 나오듯이 아내의 옷값에 쪼들리는 남편을 연상한 것이다. ‘부인의 드레스값은 남편을 괴롭게 한다’고 아예 의역한 것도 있다. 모두 장래에 당할 일을 미리 가불해다가 걱정해 대는 경제형(經濟型) 입시생들이다.

‘여자는 매력적인 남자에게 그녀 자신을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옷을 입는다.’ 의역도 이쯤되면 상당한 수준이다. 다만 ‘즐긴다’는 말의 의미를 어느 정도로 이해해야 할지 곤란하다.
그러나 다음 일련의 답안들을 보면 요즘 하이틴의 조숙도(早熟度)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여자는 남자를 만족할 만큼 자기가 용서할 수 있는 범위에서 옷을 입는다’, ‘여자의 옷은 남자에게 접근하기에 편할 정도로 커야 한다’, ‘숙녀는 남자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옷을 벗다시피 한다.(※없애야 한다)’ 아마 그런 습관을 없애야 한다는 주(註)를 붙인 것일 듯싶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여자는 옷보다 남성을 더 필요로 한다.’ 한 수 더 뜨면 ‘부인이 지니고 있는 질병만큼 그 남자에게 옮는다.’ 아마 please와 disease를 혼동한 것일 게다. 좌우간 이 학생의 발상(發想)은 곤란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여자들의 옷은 남자의 공격으로부터 그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역시 attract와 attack를 혼동한 불건전형(不健全型)의 사고방식을 드러낸다.

끝으로 아주 창의적인 상상력을 발휘한 답안들을 보자. ‘어떤 여자는 남자와 만날 때마다 옷을 바꾸어 입는다’, ‘여자가 남자 같은 옷을 입고 매우 즐거워한다’, ‘부엌을 남자가 돌보라고 하는만큼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옷을 입는다’, ‘여자의 옷은 여자 자신들 문제다.’

이런 답안을 쓰는 것은 물론 입시생 자신들 문제다. 결국 시험 당하는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것은 자기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앞서의 조숙한 답안들이 나오게끔 된 이면에는 사회의 책임도 많을 것이다. (대우가족 67호 1980.2.)

취미에는 살생(殺生)적인 수렵 낚시부터 정좌(靜坐)가 필요한 독서 음악감상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독서는 직업상 노상 해야 하는 것이니 이미 취미의 요건이 되는 기분전환의 의미는 없어졌다.

사실 미국에서 5년여의 박사학위 과정을 겪으면서 지겹도록 일상적인 독서생활만 하다 보니 무언가 색다른 일과를 마련하고 싶었다. 논문도 대충 윤곽이 잡혀 가던 마지막 해에 틈틈이 도처에 널린 낚시터로 릴(reel) 낚시도 나가 보았고, 값싸게 즐길 수 있는 대학 골프장에도 나가 보았다. 그러나 역시 시간이 많이 들어 집 가까이서 할 수 있는 취미를 찾게 되었다.

마침 그 해에는 겨울이 몹시도 추워 좀처럼 영하로 내려가지 않던 플로리다까지 한파가 몰아쳐서 내가 있던 일리노이주 등지로 공급할 겨울 야채나 과일들이 모두 얼어 버렸다. 모든 소채류값이 2?3배씩 뛰어 올랐고 그나마 품귀였다. 주위에서 자작(自作)으로 채소밭을 시작해 보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대학에서는 희망자에게 학교 농토의 일부를 그냥 할당해 주었으나 나는 가까운 집 근처 공지를 택했다.

열 가지쯤의 씨앗을 뿌렸더니 무 배추는 벌레가 생겨 실패였으나 빨간무·상추 등은 따먹기 바쁘게 잘 자랐고, 시금치·호박·오이·양파·파 등은 그런대로 조금씩 수확을 보았다. 당근은 크게 뿌리가 앉기까지 한 여름이 다 갔으나 대풍작이었다. 78년 초겨울에 귀국하면서 다 먹지 못한 채소를 모두 거두어 한국·미국 친구들에게 한아름씩 선사를 했다.

귀국 후 나의 취미는 교통편이 어려운 낚시나 돈 많이 드는 골프는 엄두도 못내고, 학교에서는 정구, 집에서는 채소 가꾸기로 낙착되었다. 정원은 이미 꽃나무들로 꽉 차있는 집이라, 슬라브식 옥상에 흙을 20여 동이 옮겨 붓고 쉬 자라는 빨간무와 벌레 타지 않는 상추를 주로 심었다. 그 뒤 신문 토픽란을 보니 외국에서도 편편한 옥상에 잔디 밭을 덮어서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춥지 않도록 한다는 기사가 났었다. 내 아이디어를 뒤늦게 탐지해 간 모양이나, 공인(公認)을 받은 것 같아 기분은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아이디어는 아직 내 것처럼 생산성이 있는 것은 못된다.

요즘 서울의 슈퍼마켓에 나가 보면 한 십년전보다는 소채류가 상당히 다양성있게 갖춰진 것을 느낄 수 있다. 붉은양배추·샐러리·샐러드용 양상추는 이미 흔해졌고, 식용 아스파라거스·꽃양배추·비이트(beet)·얌(yam) 등까지 눈에 띄는 상점도 있다. 귀국할 때 이들의 씨앗을 가져 왔더라면 손수 값싸게 길러 먹을 수 있었겠다는 후회도 난다.

한편 국내에서 고추 등의 기근이 나서 난리를 치는 것을 보곤 좀 이해가 안가는 면이 있다. 내 자신이 외국생활에서 점차 덜 맵게 먹는 습관이 붙었는지는 몰라도 우리 음식들은 근래에 너무 매워지는 유행이 든 것 같다. 음식을 맵고 짜게 해서 오래 보존할 수 있게 하는 남도 지방 풍속에 휩쓸려서인지 서울에 있는 대부분의 요식업소에서도 필요 이상의 고추를 쓴다. 대략 반 정도로 줄여도 외국산 고추는 매운 맛이 그대로 나는데 빛깔을 맞추느라고 뻘겋게 모든 반찬을 물들인다. 고추는 조금 먹으면 위액의 분비를 촉진시키고 식욕을 돋구며 혈액순환을 잘 되게 하여, 매운 음식을 먹고 나면 입맛이 개운하고 기분도 상쾌해진다. 그러나 많이 먹으면 매운 성분인 캡사이신(Capsaicin)이 위장을 자극하여 설사까지 일으키기 쉽다 한다. 아마 한국사람에게 흔한 위암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외화 절약을 위해서나 건강을 위해서도 덜 맵게 먹기 캠페인을 벌여 봄직도 하다. 아울러 에너지 절약과 생활비 절약시대를 맞아 옥상 채소밭 가꾸기도 집집이 권해 볼 만하다. 지금 뿌려도 늦가을까지 햇살은 좋을 것이고, 결코 배신하지 않는 것이 흙이니까. (대우가족 70호, 1980.5.)

H사에 다니는 선배에게 들은 얘기다. 높건 낮건 책임자석에 있는 사람이 무슨 사유로 몇 달만 그 자리를 비워 두거나, 딴 사람에게 그 일을 맡기고 떠나 있게 된다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까에 대한 염려였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요즘 세태로 보아서는 필시 그 자리에 차석자가 앉으려고 애쓰거나, 대리로 맡겨 놓은 사람이 있을 경우는 그 사람이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모든 일을 처리해 둘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이만해도 어쨌든 일은 되어가는 긍정적인 방향이고, 한편 반대의 가정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맡겨 놓고 갈 경우 서류의 문면(文面)에 나타나는 내용은 건네주고 갈지 모르나 그 이면에 숨은 자세한 경과나 앞으로의 계획까지는 일러주고 갈지 극히 의문이라는 것이다. 어느 만큼은 자기만 아는 비밀스런 구석을 남겨 두어야 그 자리를 계속 지킬 수 있는 강점으로 활용할 수 있으리라는 얘기다. 이런 상황이라면 회사 전체로 보아서는 일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는 부정적인 방향이다.

물론 위의 얘기는 한 사람의 가정(假定)에 불과하고 일반론이 아니기를 바란다. 그러나 회사의 인적 관계에 대한 경험이 없는 필자에게는 도무지 이런 얘기가 한 사람의 입에서라도 운위될 수 있는 것이라는 데 충격을 받았다. 만에 한 번이라도 이같은 사태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면 그 원인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한동안 주인이 방심하고 있는 자리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밀고 들어가 앉기, 또는 자기만 알고 자기만 할 수 있다고 믿는 사고방식이 현실에서 가장 성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여겼던 사람이 없지 않았다면, 위와 같은 사례는 만분지일의 가정으로만 끝나는 것은 아니겠다.

학문의 발전과 사제관계가 아직도 존중되고 있는 학계에서는 ‘나만 안다. 나만 할 수 있다.’는 사고 방식은 받아들여지기 매우 어렵고, 야비한 수단을 쓰지 않아도 자리의 교체는 자연히 진행되게 마련이다. 물론 학계에도 양식 없는 사람이 낄 수 있어서 남의 논문은 읽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업적과 역량만 과대 선전하는 데 주력하다가 실제로 따돌림받는 인사도 있다. 또 자기 제자에게 실력의 바닥이 드러나 보일까 겁을 먹고, 제자가 더 커갈 수 없게 충분한 지도육성에 인색한 옹졸파 교수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내가 체험한 바를 토대로 일반화시키자면 학계는 여전히 건전한 편이다. 그러면 여기서 그 이유는 무엇일까를 또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이 대학에는 65세의 정년제도가 있어서, 젊어서 빨리 이사 자리에 한치라도 가까이 다가 서려고 조바심할 심리적 압박감이 없다는 것이다. 55세가 되기 전에 요령껏 높은 자리르 따거나 돈이라도 모아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젊은 일꾼들의 행동양식에 은연중 나타난다면 그것은 제도상에도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정년을 높이기 위해서는 여러 대책이 앞서야 하겠지만 아무튼 묘안(妙案)이 나와야 할 것이다.

외국처럼 일찍 은퇴하고 은급(恩級)으로 편히 살 수 있는 지경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더 일할 수 있는 사람에게 최소한 일할 기회는 주어서 자기가 뛴 대가로 먹고 살게는 해 줘야 할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하극상(下剋上)의 우려도 진급에 대한 초조감도 없이 부장이 과장에게, 과장은 계장에게, 계장은 말단 직원에게 모든 일을 친절히 일러주며 마치 대학에서 제자를 기르듯 하는 보람을 느낄 것이다. 학계가 당장 월급은 작을지 몰라도 길게 보아 이런 쓸 만한 점도 있기는 한 셈이다. (대우가족 66호, 1980.1)

15년 동안이나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비로소 해 볼 수 있게 되었다면 누구나 기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요즘 다른 무슨 낙(樂)보다도 미술의 여러 기법에 조금씩 접해 보는 일이 제일 즐겁다.

80년대 초 캔버라에 와서 한국어 강의를 호주에 처음 개설하면서 틈이 나면 그려보겠다고 유화물감 및 붓을 한 세트 사두었었다. 그러나 그 통은 한번도 열려지지 못한 채 15년만에 호주로 다시 실려 와서야 개봉이 되었다.

중학교 때부터 유화라는 것에 대해 항상 경외스러운 느낌과 함께 한번 시도해 봤으면 하는 동기를 가지게 된 것은 미술선생님 덕분이다. 중학 1학년 입학 때 같이 부임해 오신, 우리 선배도 되시는, 최경한 화백은 미술시간마다 그 무거운 미술전집을 들고 오셔서 하나라도 더 보여 주시려고 열심이셨다.

미국 유학 5년간과 유럽연구 1년반쯤을 보내며 큰 도시를 여기저기 들릴 때마다 버릇처럼 먼저 찾았던 곳이 미술관과 박물관이었다. 아마 어려서 익혀 두었던 서양미술에 대한 지식이 동경심과 함께 그렇게 습관이 들도록 한 것이었다.
한국의 중고등학교에서야 수채화는 시켜도 유화는 보통 손도 대보기 어렵다. 그래서 시드니 북부지역 아트센터에서 첫 학기를 등록할 때도 유화반을 원했었다. 그러나 그 반은 만원이었고, 내용은 다르나 또 흥미를 끄는 것이 서양세밀화(miniature)였기에 거기에 등록을 하였다.

의외로 이 반은 여러 재료와 기법에 눈을 뜰 수 있는 창구가 되어 주었다. 한국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수채세밀화, 판화, 요철기법, 실루엣제작, 펜화 등을 10평방cm 남짓의 규격에 구현시키는 것이다. 노련한 여류작가가 지도를 하면서 서로 문화적 교류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이루었다.

3개월후 대망의 유화 및 아크릴릭, 파스텔화반에 들어갈 수 있었으나 선생이 별로 가르쳐 주는 것이 없었다. 옆사람들에게 물어봐가면서 눈치반 코치반으로 이런저런 요령을 터득하였다. 이 선생은 혼자 곧잘하는 사람은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 주겠다는 생각을 가진 듯했다.

어쨌든 이 반에서 고호의 ‘카페’그림을 임화로 그대로 그려보라해서 그렸던 것이 그럴싸하게 되어, 동료로 같이 배우던 어떤 부인이 사가겠다는 제의를 했었다. 내 생업이 바뀔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는 엄청난 감격적 사건이었다.

선생과 의논해보니 임화는 매번 다르게 그려지게 마련이니, 고호 원화를 다시 빌려 주면서 한 장 더 그려보고 마음에 드는 것은 본인이 보관을 하고 다른 것을 팔라고 충고하였다. 작품은 분신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잘 된 듯한 것은 아무리 좋은 값을 줘도 팔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번째로 등록한 과정은 새로운 미디어를 섞어 써서 추상화를 구성하는 내용이었다. 꼴라쥬, 데꼴라쥬, 젤 바탕의 채색 등 새 기법도 배웠는데 아무래도 추상화는 임화보다 어려웠다. 그대로 그린다는 것은 재주일뿐, 구체적 대상을 추상화(化)하여 재창조하는 개성있는 독창력과는 다른 것이었다. 피카소식의 작업이 더 어렵다는 것을 한 수 배운 셈이었다.

네 번째는 조각에 도전을 하였다. 도자기 만들 듯 점토성형을 해서 유약을 칠해 굽거나 또는 아크릴릭으로 칠해 인형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더 시간과 힘이 드는 것은 역시 돌조각이었다. 가장 무른 활석을 택했는데도 정교한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한 학기가 모자랐다.

다섯째 학기에는 서양서도를 택했다. 원래 깃털로 쓰던 것을 이제는 철펜촉으로 쓰지만 서법은 옛날 그리스 로마 중세시대에 쓰던 식대로 한다. 금박지를 넣고 채색을 하기도 하며 현대적 디자인을 가미하기도 한다. 나는 이 서체로 한글서예를 개발해 볼 구상을 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이번 10월부터 12월중순까지는 수채풍경화를 배워보려 한다. 시드니 주변을 찾아 직접 야외에서 진행하는 이 수업은 절경이 많은 이 곳에서 꼭 해 보아야 할 일일뿐더러, 사실 수채화가 잘 그리기에는 유화보다도 더 어렵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점점 더 어려운 고지로 올라가 보려는 욕심이다.

사실 나의 이러한 미술기호는 외가쪽에서 내려온 소질과 본가쪽에서 보고 자란 환경이 합작을 이룬 것이 아닌가 한다. 외삼촌께서는 미대를 다니셨고 계속 미술계의 업무를 관여하셨으나 작품활동은 별달리 없으셨지만, 어머님께서 늙마에 시작하신 것이기는 해도 도예와 동양화의 솜씨가 아마추어로는 일류급이시다. 나도 외탁을 한 재질이라고 믿어진다.

내가 어려서만 해도 집의 갑창마다 몇겹씩 동양화가 도배되어 켜켜 제껴져 나오는 것을 흔히 보았다. 우리집 사랑은 조선 말기 화가들의 살롱이었던 것이요, 작업장이기도 했던 것이다. 오래전부터 그랬겠지만 내가 뵈온 조부께서도 화가의 패트런으로 그 당시 서울 장안의 몇 안되는 지주로서 하실 역할을 하신 셈이었다. 그 덕분에 육이오 전에는 오원, 소림, 심전, 관재, 춘곡, 무호, 청전, 묵로 화백 등의 허다한 그림과 오세창씨의 글씨등이 집안에 많이 쌓여 있었다. 내가 철이 들어 작품에 대한 식견이 생겼을 때는 이미 많은 수가 흩어져 없어졌으나, 그래도 어려서 보고 자랐던 것과 동란 이후까지 남은 것에서 은근히 배워 온 취향이 오늘 이런 좋은 취미를 갖게 한 원동력이라고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