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 2백주년의 해라니까 생각나는 얘깃거리가 있다. 1973년 파리 동양학자 대회 참석차 처음 유럽을 가게 되어 제네바에서 기차를 타고 파리 개선문 광장 밑 지하철 역으로 계속 땅밑을 통해「입성」을 하게 되었다. 얼기설기 연결된 지하도를 누비며 되도록 개선문에 가까운 출구를 찾고 있었다. 그날이 바로 7월 14일 아침, 퐁피두 대통령 등이 사열하는 대행렬이 개선문을 통과하는 시각이었다. 초행길에 짧은 불어실력이라 안내판도 잘 안 보일 지경인 채, 개선문 로타리 밑의 원형으로 된 지하도를 두어 바퀴 돌며 아무리 갈팡질팡해도 어떤 출구도 눈에 띄지 않아, 한 아저씨에게 『우 에 르 시엘?』이라고 물었다. 『하늘이 어디 있느냐?』는 뜻이었다.

잠시 말끄러미 쳐다보던 이 신사가 홍소를 터뜨리며 한 방향을 가리켰다. 나오다 보니 「소르티(Sortie)」라는 출구 안내판이 비로소 눈에 띄었다. 수 없이 외웠던 sortir(나오다) 동사! 후에 이 이야기를 불문과 선배에게 하였더니 땅 속에서 하늘을 찾는 것은「메타피직(형이상학적)」한 맛이 있어 좋다고 하였다.

또 1985년에 훔볼트 재단 초청교수로 독일에 가서 1년을 지내게 되었는데, 첫 두달은 독일어학교 Goete Institute에 다녀야 했다. 처음부터 친했던 이탈리아 학자와 점심 때 뮌헨 중심가의 「비어가든」에 가서 음식을 시켰다. ‘뮌헨 특식’이라는 부제가 붙은 메뉴를 골라 잡았더니 식초에 흥건히 잠긴 흐늘흐늘한 고기조각들이 나왔다. 친구 녀석은 잘 알려진 ‘흰 소시지’를 시켜 먹으며 내 메뉴 내용이 무엇이냐고 했다. 웨이터를 불러 이 고기가 무엇이냐고 했더니 황소 아가리 살(Maul)이라고 손짓으로 알려주었다. 옆에서 친구 녀석이 키득키득 웃기 시작 하길래, 『암, 내가 이제 독일소의 입을 먹었으니 앞으로 독일어를 꽤 잘하게 될 거야!』라고 물론 우리 통화수단인 영어로 응대해 주었다.

그런데 곁에 있던 웨이터가 관광객을 많이 상대한 터라 영어를 알아듣고 『이 쇠고기는 아르헨티나에서 수입해 온 것입니다.』라고 나를 곤경에 몰아 넣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앞으로 스페인어도 잘 하게 될거야!』라고 했지만, 오늘날까지 스페인어는 인사말도 제대로 모르는 처지다. (1989.8.17. 조선일보 ‘一事一言’에서)

2004년 7월 23일부터 8월 1일까지 꼬박 10일간 오래만에 <홀로걷기>여행에 나섰다. 모든 일을 홀로서기로 해결하려면 힘은 들지만 단체 행동에 따르는 번거로움은 없어서 한결 생각하며 여행하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나 자신만을 위한 여행을 하게 된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지만 이것은 맨 끝에서 밝히기로 한다.

내가 에게해의 섬들을 여행하려고 작정한 것은 80년부터니까 4반세기만에 실행에 옮기게 된 셈이다. 80년 당시 호주 수도 캔베라의 호주국립대에서 호주 최초의 한국어 과정을 창설하면서, 아침마다 공관의 김 영사와 테니스도 치게 되었는데 그분의 전임지가 아테네여서 주말마다 섬들을 둘러 보니 아주 좋았다는 유혹적 정보를 들었던 것이다.

이 개인 여정에 앞서, <14차 국제한국언어학회>를 7월 12-16일간 터키 안탈랴 근처 앙카라대학 소유 해변 휴양호텔에서 개최하고, 17일 이후 내가 오래 전부터 면밀히 계획해 온 전체 일정대로, 터키의 파묵칼레, 그리스의 메테오라 등지를 같이 둘러 보았다. 그 동안 두 나라 사이를 건너며 약한 파도에도 멀미하느라 고생한 일부 회원 등 전체 일행과 작별하고, 23일 이후는 섬 사이를 각종 배로만 이동하였다.

일정은 서울에서 인터넷으로 배 시간을 찾아 짰는데, 배표 구입만은 현지에 와서 받을 수 있게 아테네 한국여행사에 부탁했다. 원래 학회 회원 중 정보를 알려 달라는 분들 때문에 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여행 안내책자에 나오는 내용은 여기에 반복할 필요가 없으므로, 다른 내역만을 좀 상세히 밝혀 드리자면 아래와 같다. 각 숙박지에 호텔도 잡아 주도록 부탁했으나, 올림픽 직전이라는 이번 상황이 아니면, 부두에 내려 직접 해결하는 편이 훨씬 나을 수도 있었다.

23/JUL:From Piraeus to Heraklion: 49.50
26/JUL:From Heraklion to Santorini: 14.50
28/JUL:From Santorini to Paros: 11.40
29/JUL:From Paros to Naxos:9.60
30/JUL:From Naxos to Mykonos:8.50
01/AUG:From Mykonos to Piraeus: 19.00 TOTAL EURO 112.50

우선 아테네의 피레우스 항구로 찾아 나가는 데에만 3개 버스를 환승하고서야 10개의 승선장 중의 하나를 제대로 찾아 내었다. Minoan Line의 highspeed ferry는 거함답지 않게 쾌속으로 지중해의 거울 같은 물결 위를 달려 나갔다. 수면이 너무 잔잔해서 깨고 나가는 행위 자체가 무슨 일을 저지르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포세이돈 신의 아침 찻잔 속을 헤치고 나가다 무엄하다는 말을 듣지나 않을지... 그러나 바다는 시종 정말 너무 고요하였다.

수영장 등 여러 시설을 둘러 보며 배 속을 누비고 다녀도 동양인은 나 하나밖에 뜨이지 않았다. 정말 지중해의 이방인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작열하는 태양볕 밑에 있자니 까뮈의 충동적 느낌을 공감할 수 있는것 같았다. 이렇게 멍해지고 있을 때 머리를 치며 떠오르는 한 마디:“아빠, 너무 태워 가지고 오면 집에 못 들어 와요!’’

첫 기착지인 크레타 섬의 이라클리온 항에 6시간만에 도착하였다. 이 섬은 그리스만이 아니라 옛 동로마제국과 베니스공국, 아랍, 오토만 터키, 독일, 영국 등이 교차로 점령해 온 동지중해의 한 가운데 있는 요충지다.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인 미노아 문명이 크노소스 궁전 등 여러 곳에서 발굴되었다. 이 궁전은 약 3,700년전에 이미 4 개 층으로 된 구조로 지어졌고 아마 1,200실 이상의 방들이 있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돌로 된 뼈대가 잘 남아 있어 우리의 목조 2층이 고작이고 몇 백년 되지 않는 문화재와는 보존력이 현저히 달랐다.

크레타에서는 섬이 커서 3일을 배당해 둘러 보았는데, 레팀논과 하나, 이 2 도시를 보는데하루 또 말리아와 아기나-니콜라스쪽으로 둘러보는데 하루가 걸렸다. 말리아라는 유적지로 가는 연변에는 유도화(유엽도)가 흐드러지게 피어 큰 가로수로 자라 있었다. 우리가 방안에서 기르는 크기와는 영 달랐다. 그런데 이곳을 운행하는 버스가 벤츠인 것까지는 좋았는데 기사가 차장 외에도 친구까지 앞쪽에 태우고 가면서 떠들어대는데 정신이 없어 안전할까 걱정이 되었다. 동네 곳곳을 들리며 친구가 길에서 보이면 클랙션으로 인사를 하고 연신 담배까지 피워대니 참 가관이었다. 그래도 버스는 앞 유리가 2x1.5m의 통유리로 된 최신 벤츠제품이었다. 에게섬들의 버스가 미코노스섬만 빼고는 모두 이렇게 최신형으로 구비되어 있어 과연 관광 우선 국가다웠다.

이라클리온의 숙소였던 Astoria Hotel 옆 고고학 박물관에서 눈에 띄기 시작한 사실이 하나 있다. 미노아 문명에서 생산 사용한 붉은 토기의 기하학적 문양 중에 과 똑같은 것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컴퓨터에 기호로 주어지지 않은 것들은 뒤에 인쇄할 때 그려서 보이기로 한다.) 이미 4천년전에, 근래에야 우리가 여러 집단의 상징으로 쓰고 있는 대부분의 기호들이 다 발명되어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불교의 만자 卍 형태가 이미 이 때에 보이며 역시 이 형태의 변형인 나치의 스와스티카(만자 획의 방향 Z가 아니라 반대로 S의 방향)도 같이 쓰이고 있었다. 불교나 나치 모두 채택연대가 한참 뒤니 원형이 크레타에서부터 전파된 것이라고 해석함이 옳겠다.

이밖에도 불교에서 윤회 사상의 표상으로 쓰는 팔등분된 원의 형태와 심지어 연화문도 이미 나타나 있고, 반전 평화주의 운동에 쓰이는 4등분된 원도 역시 이때 익히 쓰였던 것이다. 대개 BC 8-7 세기간의 적색 토기 유물들 중 기하학적 문양을 가진 것들은 한 부분에 위의 모양들을 장식으로 그려 넣었다. 더구나 유태인이 자기들 상징으로 쓰는 육각의 별(데이비드의 별)까지 BC 19-17 세기의 크레타 Phaistos지역 유물 중 clay sealing(도장을 파서 진흙에 눌러 그 굳는 것을 밀초처럼 봉한 것)에 나타나고 있었다. 토기 외에도 상자나 문을 봉할 때에 이미 다 쓰여지고 있었다.

물론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획의 조합 가능성은 빤한 것이어서 먼저 발명해 쓰는 사람이 이런 문양들을 다 만들어 쓰기 쉽지 않았겠느냐고 폄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나온 청동기나 금세공 등 문명의 수준으로 보거나, 뒤에 본 다른 섬들의 박물관 소장품들로 보아 이 이상의 영예라도 당연히 돌려주어야 할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이미 생활에 상당한 여유가 있어서 그릇을 이와 같이 다양하게 장식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우리의 신라 토기만해도 몇 천년 뒤인데도 이런 수준이 아니었다.

각 곳의 박물관 직원들도 이 사실을 잘 몰라서 내가 설명을 해 주고, 다음부터 자랑스럽게 안내를 하라고 했더니 관련자료를 복사까지 해 주며 아주 좋아 하였다. 이밖에도 불교에서 윤회 사상의 표상으로 쓰는 팔등분된 원의 형태와 심지어 연화문도 이미 나타나 있고, 반전 평화주의 운동에 쓰이는 4등분된 원도 역시 이때 익히 쓰였던 것이다. 대개 BC 8-7 세기간의 적색 토기 유물들 중 기하학적 문양을 가진 것들은 한 부분에 위의 모양들을 장식으로 그려 넣었다. 더구나 유태인이 자기들 상징으로 쓰는 육각의 별(데이비드의 별)까지 BC 19-17 세기의 크레타 Phaistos지역 유물 중 clay sealing(도장을 파서 진흙에 눌러 그 굳는 것을 밀초처럼 봉한 것)에 나타나고 있었다. 토기 외에도 상자나 문을 봉할 때에 이미 다 쓰여지고 있었다. 이 크레타 봉인의 사용과 유태인의 구약시대 중 누가 먼저인지는 좀 따져 봐야겠지만... 이 주제에 몰입하다 보니 증거가 보일 때마다 찍느라고 이후 필름을 꽤나 쓰게 되었다.

크레타 이라클리온에는 조르바로 유명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기념관과 무덤도 있다. 자유인이 되기 위해 종교상 파문까지도 감내하며 독일에서 살아야 했던 그이의 자취가 있다. 또 스페인 톨레도에서 엘그레코의 그림이 모여 있는 옛집 및 그의 걸작 '오르가스백작의 장례식'이 전시되어 있는 산토토메교회 등을 관광했었는데, 바로 그가 이곳 출신의 그리스 화가였다.

나의 꿈의 항해는 산토리니로 계속 순항하고 있었다. 달력에서 보던 섬, 그 파란 돔형 지붕에 흰벽 교회며 집들. 그리스의 국기 색을 그대로 칠해 놓은 올망졸망한 집들. 이런 것들을 연상하며 배가 섬에 접근할 무렵 나는 다시 놀라고 있었다. 아, 그 집들은 마치 눈이 온 것처럼 저 절벽위에 사풋히 흰 띠로 앉아 있고, 그 아래 바다에서 직벽으로 뻗어 오르며 펼쳐진 화산암석의 장관은 그랜드 캐년과 다름이 없었다. 콜로라도 강이 아니라 에게 바다가 밑에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달리 말하자면 백두산 천지가 바다에 빠져 있는 형상이다. 규슈 아소산의 육상 칼데라(Caldera)보다는 좀 작을 듯 어림 짐작되지만, 이곳은 마그마 분출 후 그 빈 공간으로 산체가 바다 속에 함몰된 뒤 다시 급경사의 내측벽이 침식된 특이한 반원형 분지다. 한국에서는 남해 거문도에 가서 아주 작지만 바다에 함몰된 칼데라 구조를 볼 수 있었다.

실제 산토리니섬은 화산 칼데라의 적갈색 단애가 둥그렇게 보이는 초대형 분화구 안쪽으로 배를 타고 들어가는 접근법이 가장 장관이라 하겠다. 만약 정말 광적으로 배를 싫어 해서 비행기를 타고 가야겠다면 그런 촌사람을 위해 산토리니에도 아주 평평한 변두리 쪽에 비행장이 있기는 하다. 서양인들이 평생 모은 돈을 축내 타는 선망의 수만톤급 크루즈 선들이 거대한 절벽 밑에 작은 모형배처럼 떠있는 내해는 한 폭의 그림이다. (일정한 프로그램대로 진행되는 크루즈는 한국사람이 타기에는 댄스나 카지노를 잘 하는 것이 아니라면 별로 맞지를 않는다.)

아마 산토리니(또는 시라)섬은 지구상에서 달리 보기 어려운 경치가 아닐 수 없다. 터키와 그리스의 관광지가 대개 지진과 전화로 허물어진 유적지가 많지만, 그리고 용케도 그런 모습을 그대로 둔 채 많은 관관객을 불러 모으지만, 산토리니만은 이 일대에서 카파도키아, 파묵칼레, 메테오라와 함께 꼭 보아야 할 특이한 자연 경관 중의 하나다.

그런데 자연 경관 자체만이 아니라 내가 산토리니에서 또 놀란 것은, 그 남부지역 아크로티리에서 BC 6,000-100년전 유물이 60m의 화산재에 묻혀 있다가 1967년부터 발굴되고 있는데 그 중에 미노아의 문양이 다시 나타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풍설에는 이 섬이 플라톤이 말한 사라진 아틀란티스였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지만, 하여튼 과거에 대단한 문명이 자생 또는 상륙해 있었던 곳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또 눈에 띄는 것은 호주에 많은 유칼립터스 나무가 기후 조건이 비슷한 여기에도 많이 보인다는 사실이다. 캘리포니아에 갔을 때 LA 근처에도 보이는 유칼립터스를 호주에서 옮겨온 것이라 해서 그런 줄 알았더니, 여기 원래 자생하는 듯한 이 많은 나무는 어떻게 된 것인가?

산토리니는 적어도 4개로 나눠진 섬을 보기 위해 하루 관광코스를 가담해야 교통편이 해결된다. 나는 대개 이런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내가 수집한 정보대로 시간 배정을 마음대로 하며 단독여행을 하는데, 이 때만은 할 수 없이 서양 사람들이 해상 온천욕을 하는 시간을 기다리면서 페이스를 늦출 수 밖에 없었다. (역시 한 사람뿐인 동양인은 수영복을 안 가져 갔었다.) 그런데 이 단체여행은 집합 시간에 모두 칼 같이 맞춰 수십명이 잘도 움직였다. 물론 배를 타고 내릴 때 대개 같은 자리에 가 앉게 되는데, 한번은 Chevy Dealer가 공짜로 준 셔쓰를 입은 미국녀석이 내 자리를 차지했길래 비키라했더니 딴 사람도 좀 바꿔 앉았으니 안 되겠다는 것이다. 남의 자리를 함부로 차지하는 기막힌 일이 이라크 말고 여기서도 벌어지는구나 싶었다.

땡볕 밑에서 아직도 땅 속에서는 김이 나는 분화구 중앙섬 등을 둘러보고 나면, 하루 일정 끝에 이오라는 서쪽 단애 위의 도시에서 석양을 맞게 한다. 전날 피라라는 중심 도시에서 본 것과 또 다른 각도에서 그 끓던 붉은 해가 신들의 고향으로 끌려 들어가듯 사라져 가고 있었다. 나도 카스트로라는 레스토랑에서 자리 값을 약간 포함한 음식을 시켜 먹었다.

산토리니는 어느 각도에서 사진을 찍든 그림을 그리든 작품이 나올 것 같다. 푸른색도 농도를 조금씩 달리 하는 하늘, 지붕, 바다, 그리고 하얀 집, 절벽의 적갈색 스펙트럼; 어느 때고 은퇴 후에 화판을 둘러 메고 와야지... 여기보다 좋은 풍경화, 산수화를 어디서 구하랴!

그렇지만 이 섬에서 겨울에는 춥고 바람이 심해, 노인만 남고 젊은이들은 본토인 반도로 이동한다고 한다. 여름 한 철은 돈 벌러 돈 쓰러 온 인간들로 북적이고 있지만...

다음 행선지는 조금 덜 알려진 파로스섬이다. 산토리니 이후부터 방문지는 모두 본래 키클라데스(희랍어로 사이클 ’바퀴’의 뜻) 제도라고 하여 바퀴 모양으로 모여있는 섬들이다. 사실은 이 섬과 옆의 낙소스섬을 하루씩 보는 대신 터키 쪽의 로도스섬을 가보려 했으나 너무 떨어져 있어서 직행선이 없어 운항일정에 넣지 못했다. 파로스에서는 섬 중앙 레프케스란 산동네로 가서 풍차도 보았는데 산골 동네 골목길도 모두 대리석이 깔려 있었다. 이곳에선 서양인들이 장기 휴양하는 한적한 나우사 옆 해변 지역의 호텔에서 잤는데 우연히 덤으로 뒷산에서 Michenean Acropolis를 보게 되었다. 여기가 북쪽의 펠로포네소스 반도에 중심을 둔 미케네 문명과 크레타의 미노아 문명이 서로 교차되는 지역이었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낙소스섬은 이 제도에서 가장 큰 섬으로서, 파로스를 제외한 다른 섬들처럼 돌산에 올리브 나무와 가시덤불만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여기서 숲이라고 해 봐야 짙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른 수종이 있다는 것이 눈에 띄었다. 항구의 한편 언덕에 거대한 돌문이 서있어서 인상적이었는데 뒤에 나올 신성한 델로스섬을 향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도 아피란토스라는 내륙까지 들어가 보았고 아기나-프로코피오스란 휴양지 해변 호텔에 묵었다. 독일 휴양객들이 아이들까지 다 데리고 많이 오는데, 떠날 때 주인이 아이들이 커서 또 자기 집을 찾도록 해 달라는 장면이 참으로 정겹게 보였다.

잠시 다른 얘기 좀 하자면, 이제까지 내 배낭은 아테네에서 일행과 작별하던 아침에 회원 여러분이 고맙게 남겨주신 깻잎 4, 정어리 3, 참치 3, 김치 2 깡통, 고추장 대/소, 김 6 봉지가 담겨 있었다. 큰 백을 전날 이미 여행사 지사장에게 맡겨 버린 뒤라, 그냥 배낭에 넣어 짊어지고 떠났더니 꽤 무게가 나갔다. 산토리니섬에서 중국집을 한번 만나 흰밥(우리 백반 팩만은 못하다)을 사서 같이 먹어보았지만 좀처럼 줄지를 않았다. 그래서 개발한 방법인데 생선 깡통을 깻잎에 싸서 먹으면 괜찮은 궁합이다. 특히 정어리와 깻잎이 잘 맞아 함께 소비가 잘 되었다. 여행 중에는 입에 당기는 음식을 눈치껏 찾아 먹으며 다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오징어젓까지 해 먹으며 다닐 수 있는 비법은 특별히 부탁하는 분께만 공개하겠다.)

마지막 2박 예정으로 미코노스섬으로 향하였다. 이 섬은 아테네에서 가깝고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서 그런지 젊은이로 비치가 북적대고 항구도시도 길이 좁아 복잡했다. 내가 묵었던 호텔은 꽤 좋은 Petasos 해변에 자리잡고 있어서 유럽의 부호들이 타고온 요트들이 즐비하게 정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테네에서 한국인 가이드가 누드비치가 있다고 하던 수퍼파라다이스 비치는 너무 많은 젊은이(특히 독일인)들이 해변을 메우고 있어서 아무도 가까이 서로 보이는 거리에서 과감히 벗지를 못하는 상황이었다. 미코노스섬 바로 옆에 있는 델로스섬이 내게는 무엇보다 더 인상 깊었다. 키클라데스 제도 중 상대적으로 아주 작은 섬이지만 섬 전체가 하나의 박물관 같아, BC 7 세기경 아폴론 신전 등을 비롯한 이곳 시설에 전 희랍인들이 모여 들어 델로스 동맹의 본무대로서 행사를 치루었던 곳이다. 여러 신들이 난무하던 무대가 폐허로 변해 지금은 사자상들만 즐비하게 남아 옛 영화를 지키고 있으며 3시 이후에는 모든 관광객을 퇴거 시킨다. 그리고 이곳 노천유적과 박물관에서도 미노아 문명의 영향을 확인하였는데 실제 Fontaine Minoe(이 섬은 프랑스 고고학자가 발굴하여서 다 불어로 써 놓았다.)라는 연못도 있었다.

아테네로 향하는 배를 타고 오다가 바로 들린 섬에 티노스가 있는데 여기에서는 미코노스섬보다 호텔 등 물가가 덜 비싼 곳이라 이곳에 머물며 근처 미코노스, 델로스 등 몇 군데를 둘러 보는 것도 가능하다고 한다. 그 다음 시로스섬도 정박했는데 항구 뒤 산동네가 마치 바벨탐 같이 생겨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누가 장난 전화를 해서 큰 배 속의 가상폭탄을 수색하느라고 2시간이나 지연돼 아테네 피레우스 항에 밤 11시에나 들어오게 되었다. 그래도 올림픽 용으로 새로 한국에서 제작 설치했다는 최신 전차를 타고 밤거리를 달려가서 10일전 출발점으로 되돌아 올 수 있었다.
이번 여행은 8월에 맞은 내 60갑자 생일을 자축하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서울에 있으면 집안에서도 어찌 차려야 하느니 마느니 신경 쓸 것이고, 남들도 공연히 오라가라 해야 할텐데 이렇게 홀로 즐기는 여행을 하는 것이 오히려 내게 최대의 생일 치례가 되지 않겠는가?

혼자 여행이라 쓸쓸하려니 하겠지만 사실 자아분리[좀 어렵게 말하자면, 해리解離]를 시켜서 일정을 챙기는 내가 그냥 즐기기만 하는 나를 돌봐 준다고 생각하면 둘이 다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덤으로 베를린에도 와서 한 달간 연구하며 기행문 쓰며 보내는 요즘, 서울이 연일 무더운 36도였다니 여기는 습기가 없어 무더위가 없는데다 평균 27도 정도니 너무 대조가 되어 송구스럽지만, 혼자 피서 또한 잘 된 셈이다. (2004.8.22, 베를린에서, 이상억)
?후기: 왜 ‘사모님과 같이 다니지 않았느냐‘고 궁금해 하는 분들이 있어 사족을 붙이자면, 우선 내가 이제까지 약 50개국 이상 여행을 하면서 근 20개국은 마나님을 모시고 다닌 바 있어 이미 꽤 배려를 한 셈이다. 또 7월초 우리 외동딸을 시집 보낸 뒤라 집사람이라도 서울에 남아 돌봐 줄 일도 많았고, 또 집안에서 기르는 강아지가 2 마리나 되는데 딸도 출가 후 부부 둘 다 떠나 집이 비면 밥 줄 사람이 없지 않은가? 몇 주일이나 개 호텔로 보내기에는 2 마리라 너무 비싸고, 집도 그렇게 오래 비우기는 어렵고. )

현재 터키 공화국이 자리잡고 있는 소아시아 반도 동부지역에 평균 900개 이상의 산지로 된 땅이 카파도키아(성경에는 갑바도기아, Cappadocia)다. 양과 말이 많이 생산되며 옛날 히타이트 시대부터 중앙아시아와 흑해를 잇는 무역로도 통과하였고 AD 17년 티베리우스에 의해 로마 영토가 된 이래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유적지가 되었다.

원래 이 지역은 많은 문명이 교차한 곳으로서, 원시 동굴 생활자들이 특히 현재의 네브쉐히르(Nevsehir) 근처의 괴레메(G reme) 계곡의 응회암이라는 연한 화산석이 파들어가기 쉽다는 사실을 알았다. 뾰족한 봉우리들과 절벽 및 지하에 인조 석굴을 파서 덥고 추운 이 지역의 기후를 이겨냈고 과일과 곡식들을 저장하기도 했다.

아나톨리아 고원에서 옛날에 폭발한 에르제스화산 기슭 해발 1,200m쯤에 돌기둥과 침식된 절벽으로 된 반경 60km의 지역에 화산 활동으로 용암층과 화산재가 주기적으로 쌓여 그 중 재는 쉽게 깎여 나가고 용암 부분이 버섯의 원추형 갓처럼 맨 위에 남게 되었다. 이런 광경은 지구상 다른 곳에서 찾기 어려운 기괴한 느낌을 준다. 지난 8월 이스탄불 근처를 강타한 지진이 이곳에도 일어난다면 이 모습들이 많이 손상될 염려도 있다. 터키는 유라시아, 아라비아, 아프리카 지판(地板)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 있어 자고로 지진이 많았다. 에페소, 갈라디아 지방 등의 고대 유적들이 대개 붕괴된 돌무덤으로 남은 것도 그 결과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로마 네로 황제의 박해를 피해 200여 년간 피신을 해와 3, 4세기부터는 포교를 위해 많은 교인이 거주했다. 6세기 후반부터 페르시아와 이슬람 교인들의 침공을 받자 동굴을 더욱 깊이 파 지하도시, 동굴교회 등을 건설하게 되었다. 동로마제국이 시작된 395년 이후 비잔틴시대 그리스도교인들이 이곳에 각종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으나 현재 남아 있는 석굴 교회의 프레스코 벽화는 9세기 후반 것들이다.

괴레메 지역에 약 30여 암굴교회가 남아 있어 야외박물관이라고 부르며 그리스도교 순례지가 되어 있다. 국교로 된 뒤 점차 변색 타락한 면을 반대하여 경건한 수도원 생활을 위해 일년 365일에 해당하는 365개의 암굴교회를 지었었다 한다. 8∼9세기경 성상파괴주의(Iconoclasm)가 풍미했을 때, 교회 속에 성상장식을 금했기 때문에 성화파들은 이곳에 피신·은둔하여 주변의 붉은 황토로 물고기, 포도, 사슴 등의 상징적 표현에서 십자가, 인물까지 그리게 되었다.

원추형으로 솟은 바위산을 뚫은 동굴 속은 교회뿐만 아니라 생활공간도 있어 부엌, 식당, 침실 등에 각종 살림살이가 놓였었고, 지금도 실제 사람이 살고 있는 곳도 있으며 레스토랑, 호텔로 쓰는 곳도 있다. 외부 침입을 피하기 위해 바위산들 밑에 지하도로도 연결되어 있다.

한편 지하에는 아예 작은 도시가 형성된 지역이 있어 카이마클르(Kaymarkloo), 데린쿠유(Derinkuyu)가 공개되어 있고 오즈코낙(Ozkonak)도 발굴되어 있다. 이들은 깊이 8∼11층으로 괴레메 동굴들보다 규모가 크고 지하에 있는 것이 다르다. 데린쿠유는 지하 120m까지 내려 가지만 8층까지만 공개되며 1, 2층은 동물 사육장 그 밑은 공동 부엌, 곡물저장소, 우물, 침실, 교회, 신학교, 공동묘지 등을 갖추었다. 지하 각층으로 내려가는 요소마다 둥근 큰 돌로 외부 공격시 굴려 닫는 문이 안쪽에서만 여닫게 되어 있다. 개미굴 같은 이 지하도시에 4만 명까지 생활했었다 한다.

데린쿠유에서 9km나 떨어진 카이마클르 지하도시가 터널로 연결되어 있다. 네브쉐히르 남쪽 20km의 카이마클르에는 1만 5천명 이상이 생활할 수 있었다. 지하 8층 중 4층까지 낮고 좁은 통로를 따라 개미집 같은 공간들을 훑다 보면 수직갱으로 된 통기 구멍도 있어 계속 공기가 유입된다. 그러나 이 통기구는 외적이 직접 공격하지 못하도록 맨 위가 꺾여 있다. 한기뿐 아니라 맨 밑은 우물이며 하수구도 마련되어 있고 5∼10cm 지름의 구멍이 각 방 사이에 뚫려 있어 적이 침입했을 때 신속히 의사소통을 하는 수단으로 썼다. 이렇게 통풍이 잘 되기 때문에 지하동굴 속에 감귤류를 보관해 두면 싱싱한 맛이 오래 가며 더 좋아지기까지 할 정도라 한다.

카파도키아 일대 25000평방km내에 200개 가량의 각종 크기의 지하도시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입구가 교묘히 숨겨져 있어 많이 발굴되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지상 석굴 거주자들이 비밀통로로 지하도시에 연결되어 침입시에 임시로 피신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지하도시는 위쪽 층보다 밑으로 들어갈수록 벽면이 부드럽고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시기에 걸쳐 다른 주민들이 각각의 기술로 판 것을 알 수 있다. 주민 수가 늘어감에 따라 내부를 확장했고, 입구도 방어하기 쉽게 큰 돌 사이를 작은 돌로 잘 메웠고 입구 지붕은 길고 좁으며 매끈한 돌을 썼다.

입구 굴의 길이는 3∼10m인데 그 안쪽 끝에 직경 2m쯤 되는 큰 돌 모양의 돌문이 있어 유사시에 50cm 깊이의 홈에 밀어 넣어 밖에서 밀고 들어올 수 없게 한다. 벽과 통로에는 램프와 초를 켤 공간이 있어 빛뿐만 아니라 겨울에는 열도 발생시킨다. 포도주를 짜서 익히던 공간도 있고 L자 복도 끝에 화장실이 설치되기도 했다.

지하도시의 존재는 기원전 4세기의 기록부터 알려져 있으며 히타이트, 로마시대의 특징이 남아 있고 비잔틴시대(395∼1071)에는 종교적 목적으로 쓰였고 그 뒤 셀주크·오스만·터키 시대(1071∼1922) 때는 군사적 목적으로 쓰였다. 후기의 사용자들이 앞선 시대의 고고학적 증거들을 인멸시켜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그 시초는 기원전 7-8세기까지로 추정하고 있다.

예로부터 독일의 *숨겨진 수도*로 불려진 뮌헨은 독일 남부 바이에른(라틴어로는 바바리아)주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전 독일에서도 문화적 특색이 가장 큰 도시다. 12세기 이후 1918년까지 바이에른 왕국 비테르스 바하 왕가의 왕성이 자리잡았었기 때문이다. 33개의 미술관·박물관은 1년은 살아야 다 돌아볼 수 있을 정도다.

북부 독일을 중심으로 프로시아가 강성해진 뒤에도 남부 독일만의 풍속을 잘 지켜온 지역이며, 1810년 10월17일 루드비히 I세 왕의 결혼식을 기념하여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란 축제를 시작한 이후 계속되어왔다.

매년 9월말부터 10월 첫째 일요일까지 15일간 테레즈 왕비의 이름을 딴 *테리시엔뷔제(Theresienwiese)* 즉 *테레즈 초원*이란 큰 광장에서 축제가 열린다. 각종 놀이 기구, 특히 떡메 같은 망치로 쳐서 힘 자랑을 하는 틀이나 롤러코스터 등이 설치된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뮌헨의 맥주회사들이 세우는 여섯 개 가량의 대형 천막과 그 속의 흥겨운 무대가 없으면 축제는 흥이 날 수 없다.

전통의상으로 단장한 통장이(Schaffler)들의 춤과 행진이나 술통을 가득 실은 마차의 등장에 뒤이어,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관광객들과 독일 사람들로 광장과 천막이 꽉꽉 찬다. 뮌헨 일대에 있는 큰 맥주회사들, 호프부로이, 아우구스티너, 프쇼르, 잘바토어, 특히 세계적으로 유명한 뢰벤브로이(Lobenbrau)의 사자표, 또 슈파텐브로이(Spatenbrau)의 부삽표 등등이 그려진 천막과 무대, 그리고 흥겨운 음악을 계속 연주해 주는 가수와 악단이 손님을 맞는다.

오후부터 무르익던 분위기는 밤이 되면 절정에 이른다. 북위 48도쯤이나 되는 이 지역의 시월은 꽤 일찍 어두워진다. 술을 나르는 뚱뚱한 아줌마들은 1리터 짜리 머그(mug)를 열 손가락에 하나씩 끼고 풍만한 젖가슴에 얹혀지도록 가슴 안쪽으로 몰아 누른 채 거뜬히 나르고 다닌다. 놀라운 손아귀 힘으로 10잔을 한번에 드는 이 광경은 현지에 가지 않으면 보기 어려운 예술이다.

아코디온 소리가 빨라지면 주당들이 긴 걸상 위로 올라서서 서로 어깨를 겯고 춤을 춘다. 이러다 걸상이 부러지는 소란이 일기도 한다. 국적도 인종도 초월한 분위기 속에 서로 흥겹게 움직이고 노래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사를 부리거나 흥을 깨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옥토버페스트가 단순히 매년 5백만 리터의 맥주만 소비하는 양조회사들의 행사가 아니고 문화적 명절로 자리잡은 기초가 여기 있는 듯하다.

독일 사람들에게 맥주는 술이라기 보다 석회 성분이 많은 수돗물을 대신해 마시는 음료다. 그래서 *마시는 빵*이라는 별명이 있다. 수질이 좋은 곳마다 맥주양조장이 생긴 것도 그 까닭이다.

원래 1516년 빌헬름 4세 이후 맥아에 쌉쌀한 맛을 내는 홉(hopfen)을 집어넣고 발효시켜 톡 쏘는 맛을 내게 되었다. 연기에 그을린 검은 맥아를 쓰면 흑맥주를 만들 수도 있다. 이 보리싹을 우선 분쇄하고 여과하여 가열과 냉각을 한 뒤 4~6주 발효시켜 9도C 정도로 마시면 좋은 것이다.

맥주는 잔의 7~8할을 먼저 채운 뒤 잠시 후 또 따라 거품 선이 위까지 차도록 하는 법이다. 이렇게 준비된 맥주는 지역의 시장, 상인회장, 법관 등등이 품평을 하게 마련이다.

옛날에는 수도원의 위치가 대개 수질이 좋은 곳이기도 하여 양조를 시작해 자급하다가 남는 것을 팔게 되고, 또 지방마다 교회에 이권(利權)을 주기 위해 맥주 양조장을 차리게 했었다. 요즘은 양조회사(Brau)에서 3년 과정을 배우고 5년의 경험을 쌓아서 넣는 성분의 비율에 따라 손맛을 익혀야 양조 마이스터 자격을 준다. 근래에는 작은 주점에서 직접 소규모로 담그는 *마이크로 양조*로 개성 있는 맥주를 선보이기도 한다.

맥주의 종류는 뮌헨에서만 몇 달간 병들을 모아 보아도 백여 가지가 넘었다. 독일 각처에서 나오는 지방 맥주까지 다 모으면 훨씬 더 될 것이다. 또 용기에 따라 병 맥주뿐만 아니라 생맥주를 담아내는 통 맥주(Fass Bier), 캔맥주가 있다. 맥주 질 및 맛에 따라 한국의 일반 맥주와 같은 필젠비어(Pilsener Bier, 이 맥주는 체코의 필젠 지방에서 시작되었다), 도수가 약하고 빛이 여린 헬레스비어, 알콜기가 높고 검은 둥켈비어(흑맥주), 막걸리 맛과 비슷한 흰 크림색 바이쓰비어(백맥주), 효모(Hefe)를 많이 넣어 거품이 폭발적으로 끓어오르는 헤페비어, 맥아를 많이 넣어 아이들도 마실 수 있게 달콤한 말쯔비어(Malzbier), 알콜기가 없는 알콜후라이비어, 과일맛이나 초콜렛맛이 나는 맥주 등이 있다.

계절에 따라 나오는 맥주도 있어서 봄에 양조하여 저장하였다가 오순절 후의 금식 기간에 나오는 복비어(Bockbier)는 포도주만큼 독한 독일맥주로 슈타르크비어(강맥주)라고도 한다. 원래 중부독일 아인벡(Einbeck) 지방산으로, 금식하는 수도사들이 곡기가 많은 맥주를 마시며 견디도록 마련된 것이라 한다. 멋모르고 보통 맥주처럼 마시면 곧 취하게 된다.

*수도원주점*들이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다. 전국적으로 알려진 상표는 벡스, 베릴너 킨들, 슐타이스, 아이히바움, 파울라나 등이 더 있지만, 뮌헨에서 빚어지는 맥주인 호프브로이(Hofbrau)가 관광객에게 더 잘 알려져 있다.
뮌헨 중심지 마리엔 광장의 시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옛 궁전(Hof) 전용 양조장은 지금도 밤낮으로 관광객이 들끓는 유명한 비어가르텐(Biergarten)이다. 보통은 건물 옆 정원에 객석을 준비해 놓은 야외 맥주집을 비어가르텐이라 하는데, 호프브로이는 성 같은 돌집으로 둘러싸여 있는 한 가운데 안마당(이 뜰도 hof라 함)에 정원 객석들이 꾸며져 있어 실내외로 5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다. 요즘 한국에서 맥주집을 보통 호프라고 뜻도 모른 채 부르는데 원천은 여기서 나왔던 것이다.

호프브로이는 연중 열려 있지만 테레시엔뷔제에는 옥토버페스트 기간에 가야 한다. 평상시에는 전시회(Messe)가 열리기도 하지만, 초원 한쪽에 *명예의 전당*이 있고 그 앞에 30m 높이의 *바바리아*의 여신상이 서있을 뿐이다. 그 동상 속이 비어 있어서 머리 부분까지 올라가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게 되어있다.

바바리아 지방은 옥토버페스트와 맥주로만 유명한 것이 아니다. 연간 2천만이 넘는 관광객들이 몰려와 뮌헨뿐만 아니라 바바리안 알프스 지역까지 둘러본다. 특히 노이슈반슈타인(Neuschwanstein) 성은 루드비히 2세가 19세기 후반에 짓다가 내부장식을 다 마치지 못했지만 동화 속에 나오는 성같은 외모로 널리 사랑 받고 있다.

루드비히 2세는 '태양왕' 루이 14세에 대조시켜 '달의 왕'이라 불렸을 정도로 문화, 예술, 건축에 대해 열광적인 면이 있었다. 르네상스 이후 바로크, 로코코풍의 여러 문화 유물이 남아, 뮌헨을 '이자르 강가의 아테네'로 부르기도 한다. 2차 대전때 60% 이상이 파괴된 뮌헨에서 특히 레지덴츠 왕궁박물관의 한 방은 15년에 걸쳐 재건 보존하여 놓았다. 색타일 조각의 각기 다른 곡면을 하나하나 다시 구워 원형대로 벽을 장식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독일 다운 복원 방법이다.

뮌헨은 10월 축제가 지나 춥고 눈많은 겨울을 지나다가 3월쯤 참회 화요일(Fastnacht)에 사육제를 개최한다. 거리에까지 가면을 쓴 시민들이 쏟아져 나와 카니발을 즐기고 밤까지 파티를 열며 봄을 기다린다. 이 모든 생활습관이 뮌헨 및 바바리아 특유의 *정취 또는 인정미(Gemutlichkeit)*를 풍기는 것들이다.

이렇게 즐겁게 살려는 풍속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곳 BMW(바이에른 모터 공장)에서 나오는 자동차가 튼실하기로 이름나 있듯, 그래서 Bump Me Wild! (마구 나를 받아 봐라!)라는 농담도 나타났듯, 건실한 생활을 하는 곳이 또한 뮌헨이다.

지난 8월 초순 중국 본토를 열흘간 훑어(또는 대충 핥아) 보고 올 기회가 있었다. 만리장성과 태산이 있는 산간지역도 여정에 포함되었지만, 주로 광막한 중원평야를 밤낮으로 달리는 기차도 타보았다. 그 큰 땅덩이를 부분적으로나마 맛보기에는 너무 짧은 일정이었다. 그러나 북경·청도·상해를 잇는 삼각지역 일대는 대충 살펴본 셈이고 제한된 경험을 어느 정도 쌓았다.

학생 25명을 포함한 우리 일행 30명은 각자 여러 가지 감흥을 안고 돌아왔다. 여행 중에도 서로 직감적인 판단과 추측을 주고 받으며 중국은 어떤 나라인가를 이야기하였고 돌아온 뒤에도 모여 앉을 기회를 이미 가졌었다. 가장 인상에 남는 일 중에 하나가 무엇인가 꼽아보니, 공자님의 유적이 있는 곡부(曲阜)를 둘러보고 오던 길에 제남(濟南市經五路小緯二路)의 利源飯店에서 먹은 점심메뉴가 특이하게 떠오른다.

보통 맛볼 수 없는 것만 추리면, 油炸金蟬(매미튀김), 炸全蝎(전갈튀김), 香鳩子(비둘기구이) 등이다. 웨이트리스의 극진한 대접에도 불구하고, 매미도 음식재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 일행들은 다시 전갈 접시 앞에서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필담으로 「除毒」임을 확인하고 시식을 하였지만, 이 전갈튀김은 마치 우리 여행의 실체를 상징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중국은 현재 관광수입을 위해 천안문광장의 탱크 자국이 지워지지도 않은 채 외국인들을 맞고 있다. 이 현실은 평화의 새인 비둘기도 외화획득전쟁에 동원하고 독만 빼면 전갈도 먹일 수 있다는 그들의 생활관습과도 무관하지는 않은 듯 하다.

6·25동란 이후 중국은 많이 변하여 우리에게 독없는 전갈처럼 보인다. 그러나 미국유학시 대학도서관에서 본 한 지도 도면이 나의 뇌리에 남아있다.

중국정부의 공식입장에 의거, 미국 CIA가 편찬한 역사지도에, 한반도는 유사 이래 대한제국 선포(1897)때까지 중국의 속령(Viceroy 국가)으로 같은 색깔이 칠해져 있었던 사실이다. 적어도 이러한 사관(史觀)은 우리가 기억해 둬야 할 일이다. (1989.8.30. 조선일보 ‘一事一言’에서)

96년 9월이후 호주에서는 극우적 백호주의 망령이 다시 살아나 국내외에 백해무익한 에너지 낭비를 초래하고 있다.
두 번 결혼에 실패하고 튀김집을 직영하는 폴린 핸슨이란 초선 여성 연방의원이 의회 처녀 연설에서 아시아인의 이민유입을 비난하며 적잖은 호주인의 가슴 속에 깔려 있는 촌스런 생각을 들쳐보이고 있다. 튀김하던 솜씨로 문제를 끝없이 뻥튀기고 있어도 원래 아시아에 대해 친근감이 없는 하워드 수상은 방관을 해보며 표밭이나 다지려 했다. 비전있는 정치지도자라면 앙칼진 목소리로 앞뒤없이 내뱉는 극단적 발언을 언론자유라고 두둔할 수는 없었다. 설사 적잖은 호주인이 아시아인을 싫어하고 핸슨이 그 대변을 거침없이 하는 현상이라 해도 큰 방향을 잘 잡아가야만 하는 정치경륜가는 때맞춰 키를 돌려야 했다.

핸슨이란 여자는 남자들과 조화를 잘못해 왔으므로 비백인사회에 대한 융화인들 잘 할 리가 없는 것이겠다. 그 어머니의 그 딸이라고, 시대착오적 황화론(黃禍論)을 뇌까리는 촌스런 어머니를 보면 그 성장배경이 짐작된다. 여기서 16년전 시드니에 왔다 본다이비치에서 당한 일을 소개해야 겠다. 뚝에 앉아 있는 내 등에 대고 '중국놈 돌아가라'고 외치는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7-8세 된 소년이 부모품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나는 순간 '아 저아이가 무얼 알겠냐? 부모가 그렇게 가르쳐놨겠지'라고 생각했다. 백호주의를 포기한 1973년 이후 한 세대가 바뀌었어도 잘못된 부모 노릇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듯 하다.

다수를 이루는 백인주류사회의 여론이 국제적 감각없이 국지적 촌놈처럼 흘러도, 세계여행이라도 해 보고 외국인 접촉이 많았던 일류정치인이라면 풋내기 시골의원이나 형편없는 부모들처럼 언행을 해서는 안된다. 치세가(治世家)는 우매한 대중을 일깨워 바른 길로 이끄는 용기가 필요하다. 아니면 그는 임기연장에 연연하는 일개정객일 뿐이다. 양측 당사자들 중 특히 지식인들은 서로 불필요한 마찰을 없애는 슬기를 보여야 한다.

호주 기자들이 이임하는 권병현 주호한국대사에게 덫을 놓아 한국이 핸슨발언의 표적이 되게끔하려 했겠지만, 미리 외교적 교감에 의해 그런 마찰을 피한 것은 잘한 일이다. 그런 기자도 좋은 지식인은 못된다. 한번 전주중국 호주대사가 권대사 및 필자 등을 초청한 만찬에서 여러 가지 얘기를 하던 끝에 호주가 어떻게 하면 아시아와 깊은 이해심을 가진 관계를 구축하겠는가를 질의했다. 답은 간단하다. 우선 애매한 수상의 태도로 보여진 경우 같이 불신의 원인 제공을 해서는 안된다. 그 뒤에야 여러 방안의 노력이 따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측도 호주, 특히 그 우매한 대중들이 아시아 및 그 이민자들에 깊은 이해심을 가지도록 노력을 더 해야 한다. 우선 실업율이나 범죄율을 거들먹거리지 않도록 근면하고 준법적인 생활을 보여야 한다.

나는 시드니의 한 아파트에 입주하면서 첫날부터 옆집 할머니가 유색 외국인에게 사사건건 잔소리를 하는 여자인 것을 알고 방책을 하나 세웠다. 그 할머니가 하얀 유니폼을 입고 런볼링(lawn bowling 곡구 曲球)을 하러 나가는 날, 나도 그것을 좀 해 보면 좋겠다고 했다. 그들의 생활과 문화 속으로 파고 들어가야 편견을 버리고 이해심을 보일 것 같아서였다. 내 방책은 즉각 효과가 있었고 그 이후 이 할머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북부중상류층이 살고 있는 우리 곡구 클럽을 통해 많은 노인들과 사귀게 됐다. 대부분 은퇴기의 노일들이라 무척 보수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또 세계 여기저기 이야기를 하면 그저 관광차 어디어디 정도 가 본 것이 고작이다. 노란 피부의 필자가 그래도 자기들 누구보다 못지 않은 학력과 경험을 해 온 사실을 알고는 어조를 달리한다.

한번은 하버드 대학을 관광하고 왔다는 노인이 있어 내가 2년간 리서치펠로우(Research Fellow, 연구초빙교수)로 있었다 했더니 그 뒤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됐다. 그런 대화들 속에서 나는 이 사람들은 이민자에 대한 편견이 꽤 많다는 것을 확인했고 왕당파에 자유당 지지자가 많다는 것도 재인식했다. 그러나 나 하나를 통해서라도 아시아인, 특히 한국인에 대한 이해를 넓히게 된 것은 사실이다.

나는 농담처럼 황화론이 아니라 황금론(黃金論)을 말한다. 한국에서는 김씨들이 많아 모두 금을 들고 호주에 들어오니, 황인종이 화근이 되어 내전이 일어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핸슨의 억지는 기우라고 말이다.

특히 한국은 선별된 고급이민이 많이 들어와 외국인 혐오증을 일반화시켜서는 안된다고 말해 준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곡구장엘 간다. 물론 경기자체도 즐기지만, 중간휴식시간과 끝낸 뒤 한잔하며 노인들에게라도 황금론을 설파하기 위해서, 하얗게 백의민족처럼 유니폼을 차려 입고 흰 모자를 쓰고 흰 구두까지 신고, 공을 둥그렇게 돌려 보내듯이 간접적인 말을 통해서라도 고집센 노인들 마음 속에 이해심이 생기기를 바라면서.

어차피 그들 마음 속 저바닥에 도사리고 있던 편견을 이번엔 핸슨이 들춰낸 것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백인만이 잘 살아보겠다는 앙버팀이 2000년대에는 더 이상 안 통한다는 현실을 호주의 인종편견적 보수주의자들도 절감하게 되기를 빈다. [호주동아, 1996.10]